“벌써 4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기타오케스트라’를 생소해하고 우리 아이들은 아이돌 음악에 열광하고 있죠. 가끔은 헛세월을 보내지 않았나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기타 음율이 폭넓게 사랑받을 날이 올 것이란 희망을 놓을 수는 없어요.”

한국 최초의 기타오케스트라로 창단, 국내외 기타 음악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의 단장 리여석 씨는 어느덧 일흔넷의 백발성성한 노신사가 됐다.

최근 그가 운영하는 자유공원 인근의 카페 파랑돌에서 만난 리여석 단장은 “늘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주를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감추지 못했다.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의 역사는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평여중의 국어교사였던 그는 학교장의 제안으로 기타 합주단을 꾸렸다. 어린 시절 기타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시절 내내 빠져 있던 기타를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리 단장은 “그 당시만 해도 기타는 불량스러운 이미지가 강해 학부모들의 반발이 컸다”며 “교장선생님의 지원으로 뚝심 있게 아이들을 가르쳤고 우연한 기회에 합주단이 방송에 출연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고 회상했다. 그의 말대로 기타 합주단은 1970년대 후반 수차례 TV에 출연해 기타 배우기 열풍을 이끌었다.

과거를 떠올리던 그는 “사실 음악이 뭔지도 모르고 박자만 맞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합주단을 이끌다 보니 곧 한계가 왔다”며 “당시 자만에 빠져 있던 나에게 이용주 선생 등 한국기타협회 원로들의 ‘기초를 다시 배우라’는 충고는 나를 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소회한 그는 쉼없이 기타 고수들을 찾아 수학하고 이 과정에서 작곡가 고(故) 금수현 선생의 ‘음악이론을 공부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다시 이론 공부에 매진했다.

 여기에 지휘는 자신의 음악을 아끼고 사랑해 준 친구, 김중석 초대 인천시향 지휘자를 통해 수학함으로써 비로소 이론·실기·지휘의 정점에 섰다.

이에 따라 그는 1990년대 초 모든 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는 기타오케스트라를 꾸렸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분야였기에 일본을 오가며 기타오케스트라에 맞는 악기를 수입하고 프로들을 모아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오케스트라는 대내외에 그 명성을 떨쳤다.

이후 리 단장은 수원과 대전의 기타오케스트라, 인천 2곳의 기타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또 중국 심양음대에 기타과와 오케스트라가 들어서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는 불협화음 없이 벌써 수십 년의 역사를 써 오고 있다. 순수 민간단체로 외부의 지원 없이 조직을 운영하면서 말이다.

이에 대해 리 단장은 “이득을 얻거나 돈을 벌려 하지 않았기에 그 오랜 시간 오케스트라가 유지돼 왔는지도 모르겠다”며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바친다는 열정이 있었다는 것”이라며 미소지었다.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는 오는 17일 부평아트센터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여름특선 연주회’를 갖는다. 동요와 동화를 잃어버린 요즘 아이들에게 전하는, 리 단장의 선물과 같은 공연이다.

그는 “심성이 만들어지는 청소년기에 다양한 음악을 접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며 “하지만 TV에서는 오로지 아이돌 음악만이 울려 퍼진다”고 안타까움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리 단장은 “이곳 ‘인천’에서 수십 년을 활동해 왔지만 여전히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아쉬움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기타오케스트라의 음악을 사랑하고 또 앞으로 우리의 음악을 사랑해 줄 시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연주활동을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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