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의 45세에 집필을 시작한 소설로, 그의 첫 장편소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네.

이 소설은 내 생애 처음 쓰는 진정한 장편소설이네”라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이미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전쟁과 평화」를 이에 앞서 집필했는데도 말이다.

 그가 말한 진정한 소설이란 결혼, 사랑, 종교, 예술, 죽음 등 인생의 모든 것을 다룬 작품을 의미했다. 40대 중후반은 작가의 세계관이 크게 바뀐 시기로,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삶에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877년 소설로 출간된 이래 수없이 많은 연극과 영화, 오페라와 뮤지컬로 각색된 바 있는 이 작품은 2012년 조 라이트 감독에 의해 새로운 감수성으로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여인이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사회적 존경을 받는 남편과 부유한 경제력, 사랑스러운 아들과 함께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친정오빠의 가정불화 소식을 듣게 된다. 오빠를 돕기 위해 기차에 오른 그녀는 자신을 비극적인 결말로 이끄는 치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된다.

군인 장교인 브론스키는 바람둥이 평판이 나 있는 매력적인 청년이다. 결혼을 앞둔 약혼녀가 있었지만 안나를 본 순간, 브론스키의 눈에는 오직 안나만 보일 뿐이었다.

안나 역시 첫눈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지만 가정이 있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그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거부하기에는 그들의 사랑은 뜨거웠고, 세상의 눈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느껴졌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안나는 가정을 버리고 브론스키와의 밀월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달콤함은 너무도 짧았다. 결국 지독한 상처와 아픔, 공허와 외로움만을 남긴 채 타버린 사랑 끝은 안나를 죽음이라는 비극의 종착역에 이르게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 작품은 불륜의 말로에 대해 도덕적·계몽주의적 결말을 맺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작 소설이 위대한 고전인 이유는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과 이를 통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에 있다.

비록 가정이 있는 여인인 안나가 불륜에 빠지는 것은 지탄받을 만하지만, 청교도적이고 금욕적인 남편에게서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이후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후에도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이 두려워 덮으려고만 하는 남편의 모습은 안나의 숨통을 옥죄인다.

 안나와 남편이 추구하는 삶과 사랑의 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그렇기에 둘 중 한 사람만을 두둔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또한 그녀가 여성이기에 쏟아지는 사회적 냉대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히 불륜에 대한 죗값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가 갖고 있던 귀족사회의 연애와 결혼, 생활방식과 가치관 등이 안나라는 여인의 내면적 성향과 결합돼 나타난 종합적인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약혼자인 브론스키를 안나에게 빼앗긴 키티는 이후 허영이 채운 사랑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비록 일정 부분 톨스토이가 지향하는 도덕적 결론으로 귀결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최종 결론은 작품을 접하는 독자를 향해 열어 두고 있다.

조 라이트 감독이 배우 키아라 나이틀리를 안나로 내세운 이 작품에서는 원작의 깊이를 새로운 감성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영화적 공간의 제작 세트를 끊임없이 노출해 현실과 허구의 아이러니한 상충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느낌을 배제하고 이 작품을 새로운 감각으로 볼 수 있게끔 만들어 낸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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