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회 로카르노영화제 감독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홍상수 감독의 15번째 장편영화 ‘우리 선희’가 12일 베일을 벗었다.

‘말’과 ‘평판’을 화두로 내세운 작품은 오랜만에 학교를 찾은 영화과 졸업생 선희(정유미 분)가 그녀를 애틋하게 여기는 최 교수(김상중), 문수(이선균), 재학(정재영)을 차례로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영화과 졸업생 선희는 오랜만에 학교에 들른다. 미국 유학을 위한 추천서를 최 교수에게 부탁하기 위해서. 추천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희는 최 교수와 저녁 자리를 마련하고, 최 교수에게서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는다.

그러면서 선희는 오랜만에 밖에 나온 덕에 그동안 못 봤던 과거의 두 남자도 차례로 만난다. 최근 감독으로 데뷔한 문수를 만나서는 ‘내 인생의 화두’라는 고백을 받고, 대학 선배 감독 재학과 술을 마시면서는 그의 마음을 훔친다.

차례로 이어지는 선희와 세 남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좋은 의도로 ‘삶의 충고’란 걸 해 준다. 선희에게 관심이 많은 남자들은 속내를 모르겠는 선희에 대해 억지로 정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들은 이상하게 비슷해서 마치 사람들 사이를 옮겨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충고’란 말들은 믿음을 주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 같고, 선희에 대한 남자들의 정리는 점점 선희와 상관없어 보인다.
추천서를 받아낸 선희는 나흘간의 나들이를 마치고 떠나지만, 남겨진 남자들은 ‘선희’란 말을 잡은 채 서성거린다.

극 중 한 여자와 세 남자는 한 차례도 한자리에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선희를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은 일치한다. “내성적이고 때론 또라이 같은 면도 있지만 예쁘고 똑똑하고 머리 좋고 안목 있다”는 그녀에 대한 평가는 문수의 입에서 최 교수의 입으로, 다시 재학의 입으로 반복 재생산된다.

그들은 각자 그녀를 판단하고 정의내리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녀를 진정으로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들 또한 선희라는 인물에 전혀 접근할 수 없다. 결국 영화는 어느 사람의 견해가 특정 인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평판’에 대한 진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대화하는 장면이 유독 많은 영화는 클로즈업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인물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커트 없이 촬영된 다섯 장면의 롱테이크나 그 안에서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움은 이 영화의 강점이다.

통상의 상업영화와 그 괘를 달리하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최근에 만나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영화, 코드가 맞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홍상수 감독의 어려운 영화일 수 있겠다.

선정성·폭력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성인들만 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홍 감독의 요청으로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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