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이 있고 을이 있다. A급이 있고 B급이 있다. 1안이 있고 2안이 있다. 여기에 나열한 갑과 을, A와 B, 1안과 2안은 그 뉘앙스와 쓰임새가 모두 다르다.

종속관계도 있고, 등수를 매겨 급을 표한 것도 있으며 분류를 위한 나눔이 있다. 영화를 분류해 보면 장르별, 국가별, 예술 및 상업성별로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지만 A 영화와 B 영화 같은 커다란 두 개의 분류도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다소 잘못 알려진 A급 영화와 B급 영화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본래 B picture(A 영화)라는 용어에 ‘급’이라는 단어를 붙여 해석하게 되면서 B 영화는 A보다 못한 영화라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B 영화의 시작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A 영화)와 차별화에서 탄생된다.

거대 자본과 시스템의 보호·간섭에서 벗어나 적은 예산으로 빠르고 신선한 감성을 맛볼 수 있는 것이 바로 B 영화의 특징인 것이다.

A 영화에서 보여 준 정제된 감성 대신 시퍼렇게 살아있는 날것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은 B 영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 ‘릴링턴 가의 살인’을 소개한다.

작은 키에 벗겨진 머리 그리고 늘어진 뱃살, 평범해 보이는 50대 남성 존 크리스티는 불법 의료행위로 돈을 번다. 그는 여성 환자들을 꾀어 낙태 시술을 한다. 2차대전 직후, 당시 늘어나는 부양가족을 지탱할 수 없었던 가난한 노동자 계급은 불법임을 알면서도 낙태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틈에 꿈틀대는 욕망으로 일그러진 존이 있었다. 조용하고 나긋한 말투, 딱히 눈에 띄지 않는 몸가짐. 그런 존을 여성들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개발한 최면가스를 마취제라 생각한 여성들은 가스를 흡입한 뒤 존에게 목 졸려 살해당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주인공 존 레지널드는 희대의 연쇄살인마로 1940~50년대에 걸쳐 자신의 아내를 포함, 최소 6명의 부녀자를 살해해 집 안 뒤뜰에 암매장한 인물이다.

 이 작품은 그의 첫 번째 살인에서부터 체포되기까지의 과정을 침착하게 그리고 있다. 1971년 개봉된 이 작품은 최근에 개봉된 작품들과는 달리 특수효과와 사운드로 무장해 관객의 공포심을 증폭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영화는 고요하고 차분하다.

그러나 고립된 장소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카메라, 인물의 행태를 기존에 보지 못한 섬뜩함으로 담아내는 예리한 시각으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2006년 89세의 나이로 타계한 플레이셔 감독은 고독한 인간의 삶, 사회적 부적응자의 병리학적 행태에 주목하는 영화들에 관심을 보였다. 때문에 오늘 소개한 ‘릴링턴 가의 살인’과 같이 주로 범죄영화에서 감독의 뛰어난 재능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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