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혼란스럽고 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연륜과 혜안을 가진 원로를 찾게 된다.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는 청마의 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제대로 알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들어보기 위해 새얼문화재단 지용택(77)이사장을 찾았다.

인천 토박이인 지 이사장은 1975년 그가 세운 새얼문화재단을 40년 가까이 이끌어 오고 있다. 그가 인천을 대표하는 원로이자 지성인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밑인 지난 30일 인천시 중구 정석빌딩에 자리잡은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지 이사장은 별로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면서도 그동안 그가 지역사회에 헌신했던 경험과 연륜에서 묻어나는 혜안을 제시했다. <편집자 주>

   
 
-정치권의 극심한 갈등부터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던 철도노조 파업, 그리고 연말 전국에 들불처럼 번졌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까지 지난 한 해는 여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것 같습니다. 현실 우리 사회를 이사장께서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요즘 들어 ‘이론이 없는 사회’란 생각이 자주 든다. 정당 둘이 색깔만 다르지 정책도 비슷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대 진영으로 나눠져서 상대 쪽 얘기는 전혀 안 듣는다. 결국 시민을 위한 논리는 사라지고, 자신들 진영만을 공고히 하려는 논리만 난무했다.

근래 온 사회에 회자된 ‘안녕들 하십니까’는 사실 이 자체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보다는 ‘왜 그랬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토양이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한쪽이 굴복한다 해도 억지로 굴복시킨 쪽은 부담을 안고 가야 한다. 철도노조 파업에서 봤듯이 사회 전반에 소통의 분위기가 확산되지 않으면 지금처럼 국민 불안과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소통’은 상대가 자신의 의견과 전혀 다를지라도 그 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대화석상에서 자기 얘기만 하면 어떻게 후퇴를 하고 협의를 할 수 있겠나.

-사회 전반의 불안을 딛고 인천은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와 내년 책의 수도 준비해야 한다. 또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는 해다. 지역 원로로서 혜안을 듣고 싶다.
▶인천아시안게임이 정부지원 예산이 적어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들 한다. 지난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현장에서 지켜봤는데 올림픽보다도 더 화려했던 것 같다.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부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우리가 이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시민들이 슬기를 모아 가진 범위 안에서 아시안게임을 준비해야 한다. ‘그 예산에 이만큼 했으면 됐다’라는 이야기는 듣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다. 지역의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이 돼야 한다 이런 건 아닌 것 같고, 다만 추진력 있고 시민들 가슴속에 있는 뜻을 찾아내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싶다.

사실 이것도 이론상의 얘기이고, 중요한 것은 시민이 깨어 있지 않고 방향이 없으면 좋은 지도자를 선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시민이 깨어 있지 않다면 결코 높은 수준의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올 지방선거에 출마하고자 하는 후보자에게 유권자로서 한말씀 해 주신다면.
▶초나라의 섭공(葉公) 심제량(沈諸梁)이 ‘지방을 잘 다스리려면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공자는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란 말을 남겼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말로 좋은 정치의 덕이 널리 미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의 소박한 국가론이자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글귀이기도 하다.

올해 선거에 출마할 이들은 타인의 평가보다는 먼저 본인이 자신을 엄정히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정말 봉사할 자신이 있는지, 능력이 있는지 등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 시각이 없다면 자격이 없다고 본다.

또 우리는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양당 모두에게서 진보적인 정책들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공약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정치인들은 언제든 좋은 논리로 당장은 설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는 시간과 더불어 시민들이 다 알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랜 시간 지역의 큰 어른으로서 지역사회 여러 분야의 흐름을 지켜봐 오셨는데 인천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고 계시는지요.
▶인천이 한반도의 중심인 것은 이제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간 세월의 흐름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치로만 봐도 5선 의원이 나왔다. 그 전에는 재선 의원도 찾기 어려웠는데 말이다.

요 근래 인천 전체를 내다볼 줄 알고 자기노력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인천의 미래를 일굴 수 있는 동력들이고, 따라서 이들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든다.

그래서 올해는 지역사회 각지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모임들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하고자 한다. 함께 의논하고 고민하는 모임들이 인천의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점점 사라져 가는 사람이 아닌가. 종교와 언론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사람을 찾고 그들이 다양한 모임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하고 싶다.

-지역사회의 관심과 애정 속에 시작된 ‘새얼문화재단’ 또한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지난 시간 부침 없이 재단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 궁금하다.
▶당시 ‘인천에 정체성이 있느냐’란 논란 자체에 가슴이 아팠고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시작된 게 시민문화재단이다. 인천시민의 중심을 잡고 인천 후배들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런 문화재단이 지난해 계간 황해문화 20주년, 가곡과 아리아의 밤 30주년, 후원회 30주년을 맞았고 아침대화는 2년 후 30주년을 맞는다.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기금도 56억 원이 모인 상태다.

   
 

중앙정부나 시정부에서 일체 도움을 받지 않고 타 시·도가 부러워하는 문화재단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인천시민의 힘이다. 새얼문화재단의 지난 행보 하나하나에 시민의 위대함이 깃들어 있다.

-새얼문화재단의 지난 역사 속에서 굵직한 성과를 꼽으신다면.
▶머릿속에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 중에서도 우현 고유섭 선생의 동상, 한상억·최영섭 선생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를 세운 것은 재단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이런 대단한 분들이 모두 ‘인천인’이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려 긍지가 되게 했다는 것, 오래도록 보람으로 남을 것이다.

-갑오년 새해를 맞이하는 이사장님의 바람과 시민들에게 전하고픈 말씀은.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내리교회에서 김흥규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사람의 중심이 다름 아닌 ‘아픈 곳’이라는 이야기에 공감했다.

치유해야 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래서 2014년에는 우리의 아픈 곳을 치유할 수 있는 시민운동, 우리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종교와 언론 등이 중심에 서서 옳고 그른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넓게 퍼졌으면 좋겠다.

시민들께는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해 올바른 정치는 시민들이 깨어 있을 때 꽃을 피웠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미래 또한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