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을 준비하면서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구나’란 체감도 하고, 작품이 빈곤하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더라고요. 이번 화집이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더 좋은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도 됐습니다.”

‘농민화가’라 불려온 이종구 화백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건 2010년 선생이 우현예술상을 수상한 이후 열린 기념전시회에서다. 독창적이지만 어지러운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함, 누군가가 부연하지 않아도 작가의 의중을,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작품들은 오랜 잔상으로 남았다.

이 화백이 30년이 훌쩍 넘는 지난 시간의 발자국을 책 한 권(「이종구, WORKS 1980-2013」 학고재 출판)에 담아냈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잡은 인터뷰. 그제서야 그가 올해 ‘제4회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의 조직위원장을 맡게 됐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지난 6일 만난 이 화백은 “작가란 ‘시대의 기록자’란 생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며 “그간 시간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 속에서 ‘우리 땅과 사람’이라는 큰 틀의 주제 아래 당대를 담아내고자 노력했다”고 지난 시간을 소회했다.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출간한 이번 작품집에는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 따른 농촌공동체의 변화를 포착한 ‘사람·노동’, 생명의 땅에서 자본으로 인해 변화하는 국토에 관한 연작 ‘땅·국토’, 이라크-대추리-백령도를 통해 바라본 ‘평화 연대’까지, 그의 지난 30년 작업을 세 개의 챕터로 나눠 정리했다.

그 중 여전히 많은 대중에게 먹먹한 감동을 전달하는 작품들은 그가 1980년대 민중운동 속에서 아카이브 그림으로 남기려 했던 농촌의 현실이다. 정부미 쌀부대임을 알리는 텍스트 위에 그려진, 화백과 참 많이 닮아 있는 농부의 초상. 화백의 아버지이자 질곡의 역사를 감내해 온 20세기 아버지의 모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흥을 전한다.

이 화백은 “오랜 시간 농촌에 대한 희망을 갖고 비판적 창작을 했음에도 현실은 정반대(농촌공동체의 해체)가 돼 버렸다”며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내가 그려왔고 또 앞으로 그려 갈 세계란 오직 땅의 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의 이 화백은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거짓 없는 탁발(卓拔)의 예술가’라 칭하는 고은 시인과 함께 글과 그림으로 만나는 ‘만인보(萬人譜)’ 기획을 준비 중이다. 두 예술가의 글과 그림은 우리 땅·우리 사람을 담아왔다는 점에서 참 많이 닮아 있다.

또한 그는 올해부터 민간기구의 손으로 완성할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밑그림을 구상 중이다. 올 여름 백령도를 물들일 예술가들의 상상은 그 여느 때보다 아름다운 평화의 메시지와 에너지를 담을 예정이라고.

이 화백은 “평화미술프로젝트처럼 지역의 문화를 풍성하게 하고 그 책임을 나눠 지는 것은 지역 작가의 숙명”이라며 “서울로만 향하던 전과 달리 요즘은 지역 문화를 건강하게 꾸려가는 후배들이 많아져 한결 마음이 놓인다”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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