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림 인천대 영어교육과 강사

 영국의 전 총리인 토니 블레어가 금년 초 발행된 해외 칼럼에서 교육이 곧 국가안보 문제임을 역설했다. 그 내용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 아래와 같이 요지를 소개한다.

“오늘날 지구촌 안전의 전망이 어두운 것은 거짓된 종교의 명분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와 폭력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폭력을 선전하는 극단주의자들은 젊은 사람들에 쉽게 접속하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이들은 교육의 무서운 영향력을 알고 있다.

이 극단주의자들은 젊은이들에게 그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은 적이라는 믿음을 주입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도 일정 부분 개입하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한 사회의 정치적 불만에 편승해 증오의 씨앗을 뿌리고 그 토양은 사람들의 무지에 의해 비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이 왜 우리가 21세기에 교육을 안보의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더욱이 이러한 극단주의는 세계화의 힘에 의해 강화되고 증폭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테러나 폭력보다 더 가치가 있는 길이 있음을 테러리스트들의 선동에 취약한 젊은이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이러한 극단주의를 패배시키기 위해 지구촌 전체가 동참해야 한다.”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 대입시켜 보자. 다행히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분쟁의 문제는 아직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념 간의 갈등이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논리에 의한 첨예한 대립각은 국가정책에서 사사건건 서로 부딪치며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비용이 지난해 국사교과서 선정에서 강하게 표출됐다.

전국의 3천여 학교에서 ‘교학사’ 교과서가 채택된 곳이 한 곳도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의 획일적 사고에 매몰됐음을 보여 준 불행한 사태다. 더욱이 선정 과정에서 일부 세력들의 위협과 협박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자유주의체제의 경쟁시장에서 어떻게 교육수요자가 선호하는 교과서 선택의 자유를 제3자들이 빼앗을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주변 강국에 의해 왜곡된 부분으로 얼룩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일의 실증주의 사관을 근거로 한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의 상고사는 부정됐고,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옛 고구려 땅이 우리의 역사적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그들의 지방정권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욱이 아베정권의 등장 이후 일본은 그들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우경화된 교과서를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 전후 근현대사조차 좌·우익 이념으로 갈라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 산업화, 민주화의 공과에 대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냄으로써 국가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국가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 이 땅의 주인이 될 학생들에게 건전한 국가관과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줄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이 균형 잡힌 역사관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교과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사회단체가 교과서 채택에 대해 학교에 가한 부당한 압력은 학문의 자유를 부정하는 이념의 폭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어느 보수 논객은 “좌편향 국사교과서가 90%의 학교에서 채택되도록 방치한 교육부 장관을 문책하지 않는 대통령은 취임 때 맹세한 국헌 준수와 국기(國基) 수호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아니면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가? 이런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라고 강하게 묻고 있다.

 이는 마치 1840년대 미국이 멕시코와 치른 영토전쟁을 미국 제국주의의 야욕으로 봤고 노예제도의 폐지 거부는 미국시민의 양식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도덕성의 문제로 봤기 때문에 세금 납부(인두세)를 거부한 어느 미국 지성인의 ‘시민불복종’ 논리처럼 들린다.

따라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곧 적이 아님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의 교훈처럼 교육을 통해 국가안보를 굳건히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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