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뜻하지 않았던 일들,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사건들, 예기치 않았던 순간들, 불균일한 순간들이 수많은 사람들과 우연히 겹치고 빗나가면서 우리의 하루는 구성된다. 그 불규칙한 접점들이 연결돼 하나의 시간을 구성한다. 거기엔 당연하지만 어떠한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우연의 접점들을 통과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우리는 특별하게 연결해 필연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의미 없는 시간이라 결정 내려 지워 버리기도 한다. 오늘 소개하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은 우연의 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임의로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순간순간의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

영화감독 성준은 대구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 친한 선배 형을 만나기로 한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남은 성준은 북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안면이 있는 지인들을 우연히 만난다. 이후 성준은 선배와 선배가 아끼는 후배 여교수와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그 술집에서 성준은 전 애인과 너무도 닮은 술집 여주인 예전을 만난다.

영화 ‘북촌방향’의 줄거리를 요약해 봤으나 이는 사실 무리한 압축에 가깝다. 닮은 듯 다르게 반복되고 변주되는 우연의 시간들은 등장인물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고 배열되고 정리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간의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무한 반복과 증식을 병행한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읽어도 매번 같은 페이지, 같은 줄을 읽고 있다는 느낌. 분명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장소를 원형으로 제자리걸음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만일 누군가가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냐’고 물어온다면 속 시원하게 답해 줄 말은 없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작품은 일종의 현실도피성 영화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과는 달리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는 속 시원하고 명쾌한 비현실적인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우리의 현실을 계속해서 연장시킨다. 애써 피하려 했던 비루한 장면과 잊고 싶은 기억까지도 사악할 정도로 냉정하게 끄집어내어 노골적으로 펼쳐 보인다. 비록 ‘북촌방향’은 그간 홍상수 감독이 보여 준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는 덜 아프고, 덜 창피하고, 덜 화끈거리지만 또 다른 한쪽은 더 시리고, 더 서글프며, 더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감독은 말했다. “목표점도,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 방향성도 없다. 무수한 우연과 맞닥뜨리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기만 하면 그걸로 괜찮다. 삶에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 유한하며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저 반복해서 그 공간들을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러나 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변해 가고 새로운 걸 느낀다.” 흐르는 시간 속 우연한 교차점, 불규칙한 곡선 위로 지나가는 ‘북촌방향’의 불균질한 시간 축은 그 정확하지 않은 상태로 인해 영화를 보는 이의 의식을 깨운다. 마치 생선 비늘처럼 생생하게 돋아있는 삶의 흔적을 손으로 더듬어 만지듯, 그러나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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