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탈출 제1호 ‘도망치는 리더십, 선장’이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국격(國格)은 훼손됐고 국가 이미지는 크게 추락했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인가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우리에게 희망이 없어 보이고 차라리 절망감마저 들게 한 잔인한 봄날이다.

더욱 우리를 허탈하게 하는 것은 한 세기 전, 외국인에 비친 우리의 모습도 지금과 같았다는 사실이다. 개화기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에 거주했던 외국인은 주로 서양의 선교사들과 일본인이었다.

 이들이 적어 놓은 당시의 기록들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한 대목들이 나온다. “한국의 관청은 관리들이 정오 이전에 출근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관청이 관련된 사무는 한낮이 되기까지 도대체 볼 수가 없고, 관리들은 출근을 해서도 캄캄한 방에서 잡담과 모의만을 하는 것 같으며, 한국의 관리들은 뇌물을 받지 않고는 어떤 일도 처리를 하는 법이 없으며…”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의료활동을 한 미국의 선교사 폴 크레인은 정부의 부패와 관련, 어떤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해야 되기 때문에 자리에 붙어 있을 동안 축재(蓄財)를 해 놓아야 되는 관리들의 생리 등을 적고 있다. 그는 또 한국인의 ‘안전불감증’에 대해서도 일찍이 경고했다.

 한국인은 위험요소에 대해 둔감해 사고가 나기 전엔 ‘안전관리’라는 것을 모른다고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푸른 눈에 비친 한국의 부끄러운 모습, ‘총체적 부실’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안전을 최우선시 한다던 정부의 ‘안전 책(策)’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고 어제도 오늘도 터지는 대형 사고다. 우리는 이제 웬만한 사고에는 둔감해진 듯하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안전불감증이 극에 달한 것이다. 색목인(色目人)들의 한국인의 ‘안전불감증’에 대한 지적이 옳았던 것인가.

리더십 철학의 부재 탓으로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세월호 참사란 국가적 대재앙을 당해 온 국민이 비통에 젖어 있는데 한 나라의 국무총리는 짊어진 짐이 무겁다하고 내려놓겠다며 사퇴를 표명하는가 하면, 각급 기관 수장들은 본분을 망각하고 뒷짐만 지고 있는 형국이다.

사고 해결 처리 과정을 보면 어느 한 부처기관도 일사불란,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우왕좌왕 허둥대다가 귀중한 시간만 허비했다.

해경은 위난사고 발생 시 가장 중요하다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해군 또한 바다에서 국민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는데도 무용지물이었다. 막강하다는 우리 해군은 어디로 갔는가. 수백 명에 달하는 국민을 태운 선박이 바다에서 침몰하는데도 구조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지킴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해양경찰청 홈페이지와 청사에는 오늘도 여전히 ‘안전한 바다 행복한 국민, 해양경찰이 함께 합니다’라는 무색한 캐치프레이즈가 버젓이 게시돼 있다.

이제 6·4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선출되는 인물들은 앞으로 4년 동안 한 지역 살림을 이끌어 갈 일꾼들이다. 그들은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광역의원과 기초의원, 교육감 등이다. 지방자치단체를 지도하고 이끌어 갈 위치에 있는 지도자, 리더들인 것이다. 배로 말하면 선장이요, 비행기로 말하면 조종사요, 열차로 말하면 기관사다.

거기에는 수십, 수백만의 시민이 타고 있다. 운행 도중 도망치거나 졸거나 도중에 내리거나 할 것 같은 후안무치(厚顔無恥)들을 뽑아선 안 되겠다. 이 같은 부류의 소인배(小人輩)들에게 지역 살림살이를,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그러잖아도 지방선거 당선인들 중 각종 비리에 연루돼 사법처리를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不知其數)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번 선거는 선거운동기간 부족 등으로 유권자들이 후보의 면면을 알기에 시간이 충분치 않다. 자연 ‘깜깜이 선거’가 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치러지는 지방선거다. 어느 후보가 삼베고 모시인지 잘 골라야 한다. 후보들이 하나같이 번지레하게 내세우는 공약만으로는 진위를 판별할 수가 없다. 참 공약(公約)과 허황된 빈껍데기 공약(空約)을 구분할 줄 아는 혜안(慧眼)이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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