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하는 작품 ‘정직함의 중요성’은 영국 출신의 올리버 파커 감독의 2002년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 콜린 퍼스와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작품 안에 숨어있다.

바로 영화의 원작이 된 희극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가 그렇다. 19세기 다양한 작품활동과 독특한 언행과 기행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 작가는 예술의 근원은 도덕과 윤리, 정치 등 그 어느 것에도 속박됨이 없이 오직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유미주의 운동의 선두에 선 예술인이기도 했다.

 평범한 것, 남들과 똑같은 것을 참지 못했던 이 작가는 그렇기 때문에 독특한 사고관에 기인한 어록들이 다수 존재한다. “내가 가진 것은 천재성뿐이다.”, “내 삶에 대해 알고 싶은가? 나는 내 천재성을 삶에 투영했으며, 내 글에는 내 재능을 투영했을 뿐이다.”, “결혼이란 필요에 쫓겨서 서로를 속이는 예술이다.” 등이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말들이다. 정직함의 중요성’은 그가 언급한 서로를 속이는 예술인 결혼을 소재로 한 것이다.

1890년대 영국. 잭 워딩과 엘저논 몽크리프라는 두 신사가 있다. 친구인 두 사람은 친구라는 점 외에 허상의 인물인 ‘어니스트’와 ‘번버리’라는 가공의 인물을 창조해 낸 유사점도 있었다.

잭은 시골생활이 답답해질 때마다 ‘어니스트’라는 가공의 남동생 캐릭터가 런던에서 문제를 일으켜 해결하러 가야 한다는 것을 빌미로 현실의 삶을 탈출한다.

그리고 런던에서 자신이 문제의 그 ‘어니스트’로 생활하며 도시의 향락을 즐긴다. 즉, ‘어니스트’라는 이름은 자유롭게 살고 싶은 그의 욕망을 대면하는 또 다른 자아인 셈이다. 알저논 또한 ‘번버리’라는 불치병에 걸린 친구를 창조해 내 가족모임 등과 같은 집안의 행사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나 이들의 거짓 생활은 엘저논의 사촌인 그웬돌린이 어니스트를 사랑하게 되면서 복잡하게 꼬여 간다.

그웬돌린은 어니스트(earnest, 진실한, 정직한)와 발음이 같은 어니스트(Ernest)야말로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개인적인 신념으로 사랑에 빠져든다. ‘어니스트’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잭 또한 그녀를 보고 사랑을 느끼지만 거짓된 이름에서 비롯된 그녀의 감정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엘저논은 빚에 시달리다가 결국 도피를 위해 잭의 시골마을로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말썽쟁이 동생 ‘어니스트’라고 밝히며 잭이 없는 집에서 주인 동생을 가장해 거짓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뜻밖의 여인과 ‘어니스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사랑에 빠지면서 하나의 이름을 둘러싼 4명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이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힘은 어니스트라는 단어다. ‘정직한’을 뜻하는 단어(earnest)와 발음이 같은 남성 이름인 어니스트(Ernest)에 집착하는 4명의 남녀를 통해 정직과 거짓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인간의 이중성과 사회의 모순 등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다.

사실 작품의 배경이 된 빅토리아 여왕 통치의 19세기 영국은 규범을 중시하는 진지한 사회였다. 당시 사회는 높은 도덕과 규율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진지함과 진실함 등을 미덕으로 삼을 것을 강조했지만, 이와는 모순되게 사회는 전반적으로 ‘진지한 채하기’, ‘정직한 채하기’의 사회로 흘러갔다.

겉으로 나타나는 진지한 표면과 정반대로 거짓과 은밀한 향락이 판치는 겉치레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곡 작품 ’정직함의 중요성’과 그 동명 영화는 당시 속물근성의 사회를 ‘어니스트’라는 이름에 대한 집착을 통해 조롱하고 있다.

더 나아가 거짓으로 위장한 ‘어니스트’라는 이름 뒤에는 가식적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라는 역설적인 의미 또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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