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국가 간 전면적 전쟁이나 대형 자연재해는 국민을 집단적 고통으로 몰아넣는 국가적 재앙이다. 그런데 인재가 겹친 대형 참사가 국가적 충격과 함께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이 불신을 사게 되는 경우에는 정권을 위기로 모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선조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두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에 직접 항복해야만 했고, 세종 이후에 가장 탁월한 왕의 자질을 가졌던 큰아들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에 관여한 인물로 의심되는 인조보다 더 무능한 국왕으로 인식돼 있다.

게다가 인조도 이괄의 난으로 인해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도피한 바 있지만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다시피 한양을 떠난 선조의 행태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가혹하리 만큼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타당성과 적절성 여부에 대한 평가에 앞서 사림의 세상을 꿈꿨던 선조는 그렇게 만만한 군왕이 아니다.

실록에서 발견되는 그는 사서삼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해 한글의 문자로서의 위상을 경전 번역어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뤄 낸 군주였다. 퇴계와 기대승, 율곡과 이준경, 유성룡과 김성일, 이항복과 이덕형을 비롯해 서경덕, 정철, 이순신, 권율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상 기라성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대거 활동하던 시기 또한 바로 이때였다.

이는 인재를 알아보는 선조의 정치적 감각과 더불어 선조 특유의 위임 통치로 인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집권 과정이 비정상적이었던 5공 정권의 전두환 전 대통령도 자신의 정치적 부도덕성을 극복하고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참신한 사람을 선발하는 데 특히 심혈을 기울인 바 있다.

선조 또한 조선 건국 이래 최초의 후궁의 손자라는 치명적인 신분상의 약점을 해소하기 위해 유능하고 도덕적인 관리 등용에 큰 관심을 기울였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들이 임진왜란 이후의 사태 수습과 정국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국정을 안정되게 운영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의 리더십은 절대적이다. 국왕의 권위를 극도로 실추시키면서까지 선조가 아홉 차례에 걸쳐 일으킨 선위 파동도 리더십의 회복과 강화라는 목적에서 행해진 고도의 전략적 판단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 왕조도 신권보다 왕권이 강했을 때 국력도 강했고 국가도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반면에 신권이 강력하게 득세할 때 국가는 각종 내우외환에 직면하고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백성들의 삶이 더 고단했던 것이다. 강한 신권이 복잡한 갈등과 각종 혼란을 부추기고 양산시켰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주장했던 이른바 신권정치는 이론만큼 발전적인 국가 운영에 긍정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상적인 측면이 있었다. 군신공치(君臣共治)의 문제점과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었던 사람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왕권 강화와 왕의 독선이나 독재는 서로 다른 사안이다. 조선이 백성들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라도 강한 왕권은 필수적이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투쟁이나 저항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강한 리더십과 안정된 국정 운영이 어우러질 때 가능하다.

국가 목표의 달성을 위해 지속적이고 일관된 국정 운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과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방해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마찬가지로 국정의 파트너로서 정부를 견제하는 것과 다음 집권을 고려해 대통령을 흔드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이다. 현재 여당도 과거 야당시절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대해 어떤 추태(?)를 보였는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

신뢰는 진정성에서 배태돼 포용과 의연함에서 꽃을 피운다. 신뢰를 얻기가 정 어려우면 국민들이 눈치 못 채게 흉내라도 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국정 안정은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 모두를 위해서다. 대통령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국민들 때문에 존재한다. 저들이나 그들의 대통령이 아닌 우리의 대통령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대통령은 온전하게 국가와 국민의 품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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