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림 인천대학교 영어교육과 강사

 기원전 3~4세기, 전국시대에는 중국 문화의 원류인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이 꽃을 피웠다. 동시대의 그리스에는 ‘현자’라고 불리는 소피스트들의 현학적인 수사학이 있었고 이들은 직업적인 교사로서 그리스어권 세계를 다니면서 수업료를 받고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가르쳤다.

어떻게 동서 학문이 이와 같은 집단지성의 형태로 동시다발적으로 발아될 수 있었는가? 이 시대에는 철기문화가 보편화되면서 기술의 고도화와 함께 사회가 계층화되고 도시가 등장했으며, 높은 생산력과 잉여생산물이 증가하면서 삶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래의 주술적인 신관(神觀)과 자연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바라보게 됐다.

 또한 전국시대는 구질서가 타파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경세치유의 신진 지식인이 요구됐다.

이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은 정치, 행정, 군사 등 입신을 위한 학문에 국한된 반면 소피스트들에 시작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경우는 학문을 위한 학문인 철학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훗날 서양에서 철학으로부터 자연과학이 분화·발전되는 토양이 됐다.

제자백가 중에는 궤변학파라고 불리는 명가(名家)가 있다. 이 학파는 명목과 실체의 관계를 중시해 명실합일(名實合一)을 주장했다.

이 명가 중 정나라의 등석이라는 자는 일찍부터 뛰어난 변론술로써 유명했다. 그에게 사건을 의뢰하면 질 수밖에 없는 재판도 그의 변론으로 뒤집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송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먼저 그에게 달려갔다.

더욱이 같은 사건에서 두 당사자 모두 그에게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에는 이른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역딜레마인 양가지설(兩可之說)로써 두 사람 몫의 상담료를 챙겼다. 물에 빠진 시신을 구한 어부에게 부자의 유족이 시신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하자 어부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그 부자는 등석에게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 등석은 “기다려라”라고 했다. 유족이 시신이 썩을 것을 염려하자 그는 “썩으면 더 좋다. 당신들밖에는 시신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기다리면 값은 점점 떨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이에 당황한 어부가 등석에게 달려와서 상의했다.

그는 “기다려라”라고 했다. 어부는 “시신이 썩을 텐데요”하자 “그러면 더욱 좋다. 그 사람들은 당신 외에는 시신을 구할 수 없으니 기다릴수록 값은 점점 올라갈 것이다”라고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나 등석은 확실히 의뢰인들에게서 상담료를 두 배로 챙겼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정나라에는 교언영색의 변론가들이 넘쳐났고 이로 인해 사회가 어지럽게 되자 당시의 재상이었던 자산은 등석을 잡아 죽이고 만다. 논어에는 ‘말을 교묘하게 꾸며대고 얼굴색을 착하게 꾸며대는 자 치고 어진 사람이 드물다’(子曰 巧言令色 鮮矣仁)라고 했다.

공자는 이러한 사람을 사이비라고 했고, 이 사이비를 가장 미워했다고 맹자는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에 진실의 여부를 가리지 않고 돈만 벌기 위해 사회와 나라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비슷할 뿐 실제가 아닌 사이비를 예수는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칭하며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이들을 질타했다.

오늘날 사이비들로 인해 초래된 사회의 적폐는 나라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꾸며대는 말로 백성을 속여 권력을 잡으려 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돈만을 벌려는 가짜들의 거짓이 판치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이 나라가 법과 원칙이 통하는 투명한 사회가 되려면 가장 먼저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사이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들이 바로 서면 사회질서는 회복되고 나라는 안정을 찾을 수 있음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 우리는 왜 성현들이 교언영색을 일삼는 사이비들을 미워하고 외식하는 자들을 질타했는지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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