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옥엽 기호일보 독자위원

 기록은 남기는 것만큼이나 그 보존도 중요한 문제이다. 과거 선조들은 그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이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여러 곳에 사고(史庫)를 두고 분산, 보관했다.

‘사고’(史庫)는 말 그대로 역사책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실록을 사고에 보관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는데, 특히, 고려 후기에는 실록의 완전한 소실을 막기 위해 수도인 개경에 내사고(內史庫)를, 지방에는 외사고(外史庫)를 두어 2원 체제로 운영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방식은 계승됐다.

임금이 사망하면 임시 기구인 실록청(實錄廳)을 두어 전(前)왕의 실록을 편찬했는데, 그 자료의 중요성 때문에 한 부가 아닌 여러 부를 만들었다. 실록의 편찬 부수는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4부를 만드는 것이 정례였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는 장소는 조선 전기와 후기에 차이가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는 서울 궁궐내의 춘추관(春秋館)과 충청도 충주, 전라도 전주, 경상도 성주 등 4곳에 사고를 설치해 실록 1부씩을 보관했다.

조선 후기에는 강화의 마니산과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평안도 묘향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등 4곳에 사고를 두었다.

조선 전기의 4사고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서울과 지방관이 거주하는 읍치(邑治)에 위치해 있었기에 화재 등으로 서책들이 몇 차례 수난을 당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 요지들은 왜군에게 점령됐고, 그에 따라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의 서적은 불타 버렸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실록의 편찬을 담당했던 춘추관이 서울에 있었으므로 춘추관 사고를 서울에 두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그 외의 사고는 모두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시켰다.

그러다가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불까지 나면서 인근의 정족산 사고로 이전했다. 묘향산 사고 역시, 후금(청)의 침입을 걱정하여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이전했다.

 따라서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강화도는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이전에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고려왕조실록’(태조∼강종)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 도서를 옮겨 28년 간 내사고(內史庫)의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개경 환도(1270년) 이후에도 병란이 발생하면 실록을 강화로 피신시킨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실록의 재 인쇄가 시작된 1603년부터 재 인쇄 작업이 끝나는 1606년까지 강화부내(봉선전 서쪽)에 사고를 두었다.

이후 새로 재 인쇄된 실록 4질과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 한 질 등 도합 5질본을 나눠 보관하기 위해 5사고 설치가 추진되면서 마니산사고도 설치됐다.

그러나 마니산사고는 1653년(효종4) 11월 사각(史閣)의 실화 사건으로 자료를 소실하게 되면서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사고를 새로 짓고 남은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강화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광복 후 정족산본이라는 이름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사관(史官)은 예문관(藝文館) 소속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벼슬을 말하는데, 이들이 소위 말하는 한림(翰林)들이다.

실록편찬에는 실무를 맡은 한림 8명과 겸사관 52명 등 모두 60명 정도가 활약하였는데, 52명에 달하는 겸춘추는 당시 중요 관청에서 요직으로 일하던 대부분의 관료들을 망라했다.

일제강점기에 춘추관은 없어졌다가, 광복 후 미군정청하에서 국사관(國史館)으로 발족되고, 1949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로 개칭되면서 수사관(修史官)·편사관(編史官) 등의 명칭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국가공공기록물들은 사고 대신에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어 보존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와 별도로 어보(御寶), 어제(御製) 등 왕실 물품과 어람(御覽)용 의궤(儀軌) 등 왕실관계의 중요 기록을 보관했던 외규장각도 있었다.

 이렇게 강화도가 국가의 중요 기록물을 안전하게 보관·보존했던 사실은 ‘세계 책의 수도’를 지향하는 인천으로서는 중요한 문화콘텐츠이고 역사문화자산이다. 여기서 또 한번 인천의 역사성, 장소성, 공간적 특성을 재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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