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 치하의 고단한 현실에서 맞이한 민족의 광복은 그야말로 모두에게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런 환희의 날이었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 측은 전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카이로회담을 열었고,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 데 이어 38선 분할안이 제기됐다. 그리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일왕(日王)의 목소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리자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 패전 당시 한반도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120만 명 정도의 일본인이 거류하고 있었다. 일본인 군인이 32만 명 이상, 그리고 민간인이 80만 명 이상이었다.

갑작스러운 패전에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세화회(世話會)를 조직하고 잔류 일본인들의 단합을 꾀하는 한편,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재향군인들을 무장시켜 순사 복장으로 각 파출소를 경비하는 등 한국인들의 응징에 대비했다. 인천에서도 일본인들은 인천세화회를 조직하고 신변 안전과 본국 귀환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패망과 함께 본국으로 떠났지만 인천 거주 1천326명은 패망 4개월이 지난 연말까지도 별탈 없이 생활했고, 오히려 인천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 경찰 등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을 펼쳐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본국으로 빼돌리기도 했고, 중요 공공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지만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지역은 여전히 일본군 내지 일본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들은 인천시민들 역시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는데 ‘조선독립만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삼창을 외치면서 내동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었다.

다 죽은 듯이 일제정치를 인내해 온, 바보스럽게만 보였던 조선인들에게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엄연히 살아있었다는 역사의 증언이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최초로 상륙함을 기화로 한반도는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러시아가 점령하는 분단의 상황을 맞게 됐고 현재까지도 숙명적인 과제로 남게 됐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날, 아이니컬하게도 무장한 많은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이 경비를 섰고 인천지역의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보안대, 노동조합원들은 미군의 인천 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연합국기를 들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인 경찰들은 환영 나온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했고 권평근 이하 수십 명이 사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미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인천부터 미군정(軍政) 시대로 접어들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매해 순국선열에 대한 예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광복 이후 6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청산되지 않은 그때 그 시절의 잔재들이 남아 있고, 광복으로 주권을 되찾았던 감격의 순간은 잠시였을 뿐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언제부터 어디서 어떻게 꼬였는지도 알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올해도 예외없이 매년 하던 것처럼 광복절 행사가 진행된다. 바라건대 국가와 민족을 ‘지조’ 하나로 지켜낸 선조들이 남긴 이 해방공간에서, 과연 지조 있는 삶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기에 이렇게 처참한 실망감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이 돼야 할 것이다.

역사가 남긴 이 무거운 과제들을 고민이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자문해 보는 것이 광복절을 맞는 마음의 자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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