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쉽지 않다. 드라마, 영화, 소설, 노래 등 수많은 곳에서 사랑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지만 그 과정이 장밋빛이든 고통의 가시밭길이든 상관없이 모두 드라마틱하다. 어쩌면 우리는 갈등과 드라마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강박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아픈 사랑일수록 애정의 당사자들도,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빠르게 동화되며 몰입한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1955년 작 ‘부운’에서 보여 주는 사랑은 드라마틱한 사랑과는 한참 다르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오래 이어가는 그들의 만남은 궁색한 변명으로 느껴질 만큼 지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 처연함 때문이다. 애달고도 구슬픈 두 사람의 사랑은 극적으로 꾸미지 않았음에 더욱 진한 잔향을 남긴다.

1950년대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3대 감독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1980~90년대에 이르러 재조명받게 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대표작 ‘부운’을 만나 보자.

추운 겨울, 변변한 코트도 없이 얇은 외투 안에 몸을 깊숙이 묻고 통이 넓은 고무줄바지를 입은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며 총총히 걸어간다. 애써 찾은 도미오카의 집에서 그녀는 남성의 가족들과 마주한다. 장모와 아내와 함께 사는 남자. 그녀는 이 남자를 사랑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던 1940년대 어느 시절, 두 사람은 동남아시아에서 만났다.

파견직으로 해외에서 근무하던 둘은 그렇게 만나 마치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운명 같은 사랑을 운운하며 사랑에 빠졌던 건 어쩌면 유키코 혼자뿐인지도 모른다.

 패망 후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남자는 유키코에게 아내와 가정을 정리할 거라 맹세했지만, 막상 일본에 도착한 이후 그의 다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패전과 함께 나락으로 빠진 일본처럼 그 남자의 정신도 언제나 피폐했다. 그의 머릿속엔 다시 일어서기 위한 외침만이 가득 울릴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랑타령만 하는 유키코는 어쩐지 한심하고 태평해 보일 뿐이다. 책임지지도 못할 행동을 한 자신보다는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유키코가 성가실 뿐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생각도 변명일 뿐, 그는 아내와 유키코 외에도 여러 여성들과 쉽게 만나 책임지지 않는 관계를 이어간다.

반드시 이용했다고 치부할 수는 없으나 그 남자는 자신을 대하는 유키코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에서건 감정적인 이유에서건 그가 그녀를 찾을 때 그녀는 반복적으로 상처받고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응답한다.

오랜 세월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두 사람의 결말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까? 부질없는 해피엔딩에 기대고 싶은 건 여주인공 유키코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어느덧 가슴이 미어진다.

나루세 감독의 처연한 사랑이야기 중 백미로 꼽히는 이 작품은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전쟁 이후 일본의 삶과 당시 사회를 남녀의 측은한 사랑 이야기와 함께 사실적이고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명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나루세 감독은 인간 본연의 이기심과 욕망 그리고 모순된 감정들을 그만의 탁월한 연출력으로 작품 안에 섬세하게 펼쳐 보였다.

이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총애한 일본의 전설적인 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가 표현한 유키코를 통해 아프도록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가 그린 삶과 사랑 그리고 상대를 갈망하는 마음은 떠도는 구름처럼 부유한다. 그러나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황량하게도 흩어지듯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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