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막바지 무더위로 곡식과 과일이 여물어 갈 계절인데, 예년에 몰랐던 가을장마가 길게 이어진다. 추석을 앞둔 농촌의 시름은 깊어질 테고, 조상님은 햇과일을 맛보기 어렵겠다.

가을장마가 식혀도 한낮은 여전히 걷기 부담스럽게 덥다. 일부러 몇 정거장을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곤 하는데, 땀에 젖은 옷차림이 민망하다. 여름이면 밤 시간에 동네를 걷지만 연이은 술 약속은 걷는 시간을 빼앗는다.

곧 추석이다. 기상이변으로 혼란스러워도 계절은 가을을 향한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지니 낮에 걸어도 덜 민망해질 텐데, 무얼 신어야 하나. 양복을 입었으니 강의실이나 회의장에 운동화를 신고 들어가기 어색하다. 오랜 보행에 적합한 이른바 ‘트레킹화’도 양복에 어울리지 않다.

 하는 수 없이 굽이 푹신한 구두를 택하지만 금세 닳는다. 굽을 여러 차례 바꿨지만 감당이 안 된다. 발도 편안하지 않다. 양복에 잘 어울리는 운동화, 어디 없을까?

집에 신발이 참 많다. 색상을 달리하는 구두와 계절을 달리하는 운동화만이 아니다. 식구 수만큼 트레킹화가 있고 슬리퍼도 한두 켤레가 아니다. 비 올 때 신는 운동화도 신발장을 차지하니, 어느 날 문득 현관에 흩어진 신발들을 보니 집 안 가득 손님이 온 상황이다.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 학생인 우리는 운동화 한 켤레로 살았다. 걷거나 뛰는 건 물론이고 등산도 축구도 해결했다. 어른들도 대개 구두 한 켤레로 만족했다.

페트병을 납작하게 찌그려서 신는 아프리카 난민의 신발을 사진으로 전시하며 후원을 부탁하는 유니세프 활동가를 외면하고 올라탄 지하철에서 건너편에 나란히 앉은 승객을 물끄러미 살펴본다.

출퇴근시간이 아니면 한가로운 지하철에서 대부분의 승객은 스마트폰에 심취해 건너에 앉은 이가 자신의 신발을 유심하게 바라보는 걸 눈치 채지 못한다.

굽이 높고 낮은 여성의 구두, 형형색색의 운동화, 슬리퍼도 많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레인부츠’라 칭하며 높은 가격에 파는 원색의 장화도 제법 눈에 띈다.

운동화와 슬리퍼는 물론이고, 쇠가죽으로 만든 구두라도 굽은 대부분 플라스틱이다. 아예 플라스틱 재질만으로 만든 신발도 많다. 그런 신발은 당연히 구입했다. 신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짚신과 나막신이 아니라면 제 신발을 만들어 신지 못한다.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고 집도 직접 지어 살았던 조상도 신발은 대개 장터에서 사거나 물물교환으로 구입했을 것이다. 짚신과 나막신이라도 미투리처럼 장인이 만들어 팔았을 텐데, 지금은 대단한 고급 신발이 아니라면 기계로 대량 생산한다. 신발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플라스틱과 가죽의 양은 그만큼 막대하겠지.

플라스틱은 석유를 가공해서 얻는다. 쇠가죽이야 도살한 소에서 얻지만 도살하기 전까지 소를 사육하는 데 들어가는 석유의 양이 만만치 않다. 축사의 냉난방과 쇠가죽 운반에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다.

주로 옥수수와 콩으로 가공하는 축산사료를 생산하는 데 석유가 걷잡을 수 없이 들어간다.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살충제는 석유를 가공해서 제조한다. 곡물과 사료와 도축할 소와 가죽을 운반·저장·가공·폐기하는 데 들어가는 석유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한데, 석유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엄밀하게 석유는 생산하는 게 아니다. 땅속에서 퍼 올리는데, 전문가들은 석유위기를 점친다. 퍼 올리는 석유보다 소비하는 양이 늘어난 상황을 ‘피크 오일’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짧게 잡아도 5년 전, 냉정하게 10년 전부터 피크 오일이 지났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지구촌의 석유 소비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줄기는커녕 신흥공업국의 합세로 도저히 공급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내려갈 줄 모르는 석유 가격은 머지않아 치솟을 것이다.

석유가 없으면 의식주를 거의 해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신발을 구비해 놓고 그날그날의 취향과 목적에 따라 한 켤레를 신고 거리에 나선다.

 그런 호사, 한 세대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다음 세대는 구가할 수 있을까? 석유시계는 곧 멈출 것이다. 넘치도록 많은 신발을 보며 석유위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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