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하게 흐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청춘도 흐르는 시간 앞에 시들기 마련이다. 발갛게 물든 장밋빛 볼과 총총한 눈동자의 생기가 줄어든다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황혼의 삶이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속도와는 다른 시간 속에서 그 나름의 여유와 기쁨을 발견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 고즈넉한 일상을 내 살처럼 익숙한 평생의 배우자와 함께할 수 있다면, 이는 무엇보다 든든한 위안일 것이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질 것들’은 이처럼 주름진 노년을 함께 맞이하는 노부부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매일이 커다란 변화 없이 흘러가는 일상이라 이들은 자신 앞에 남은 시간이 많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며 살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의 끝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잊고 살아갔다. 그 부재가 확인되기 전까지.

정년을 목전에 둔 남편의 하루는 열차 시간표처럼 언제나 정확하다. 그리고 변화도 없다.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루디와 트루디 부부는 세 자녀를 출가시킨 후 단출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루디는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말기 암, 시한부 판정을 들은 아내는 남편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지 못한 채 홀로 슬퍼한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남편을 위해 아내는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을 만나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베를린으로 향하는 남편은 익숙하지 않은 대도시의 삶이 불편하기만 하다. 이미 각자의 가정을 꾸린 자식들은 오랜만에 방문하신 부모님께 잘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이 부담스럽다.

 이런 자녀들에게 섭섭함을 느낀 부모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고, 이들은 집에 돌아가기 전 바닷가를 거닐며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그리고 그 회상 끝에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서로가 서로의 곁을 변함없이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다시 익숙한 시골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아침, 남편은 싸늘하게 식어 있는 아내의 주검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언제나 제자리를 지켜줄 것 같았던 아내가 떠났다.

아내의 뜻밖에 죽음 앞에서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생전 그녀의 삶을 더듬어 보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과거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묻어 둔 꿈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시절 아내는 일본 춤인 ‘부토 댄스’에 매료돼 있었다.

그러나 가정을 위해 아내는 꿈을 접고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아갔다. 비록 뒤늦은 감은 있지만 남편 로디는 아내가 생전에 애정을 품었던 후지산과 부토 댄스를 찾아 일본으로 향한다.

이 세상에 지속가능한 것이란 어떤 것에도 지속되지 못한다는 그 진실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진실을 쉽게 용납할 수가 없다. 고통은 바로 그런 간극에서 나온다. 잡아두고 싶은 우리의 본성 혹은 욕망과 이에 반해 변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삶의 이야기 또한 하고 있다. 남편의 부재를 걱정하던 아내와 아내의 부재를 목도한 남편. 영화는 죽음이라는 커다란 이별 앞에서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여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족의 사랑은 쉽게 변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언제나 늘 한결같이 우리를 안아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편협한 마음은 가족 간의 사랑을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기 전까지 잘 느끼지 못한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가슴 뭉클하게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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