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운 객원논설위원

 “공정사회 어렵지 않아요”라고 외치던 개그맨이 생각난다. 공정사회는 불합리와 불평등, 불공정을 극복하고 법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학력·직업·계층에 차별받지 않는 정의사회를 지칭한다. 우리는 공정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집단이기주의(주변에서 많이 보는 찬성과 반대의 시위), 개인주의(자신의 이익과 편안함을 위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유기하는 행위 등) 그리고 물질 추구만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앞만 보고 주위를 살피지 않는 이기심의 극치를 보면서 과연 공정성이 자리를 제대로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얻기 어렵다.

영화 ‘공정사회(2013년)’는 이지승 감독의 작품으로 딸의 성폭력범을 경찰과 국가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 단죄하는 한 엄마의 이야기다. 영화라는 틀에서 어느 정도 픽션에 초점을 뒀지만,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게 더욱 충격적이다.

 범인을 잡기보다는 면피하려는, 그냥 타성에 젖은 공무원과 안타까운 당사자. 어쩌면 지금의 우리 정부와 국민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들의 손톱 밑 가시를 빼주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정부와 부처 간(칸막이 예산과 정책) 이기주의에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여러 번 강조됐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영화 속처럼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판사, 개인이 법을 집행하면 범죄가 된다.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겠다면 판사가 제대로 된 법을 집행해야 한다. 일당 5억 원의 황제 노역(전 대주그룹 회장)에 대해 한국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당연히 법과 원칙에 의해 집행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일당 5억 원은 우리 정서상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법대로 했다면 그 법은 당연히 잘못됐으니 고쳐야 한다.

항간에 경제사범 10억 원 이하는 잡지도 않는다고 한다(경제위기 이후 너무나 많은 경제사범으로 일일이 잡을 수 없단다).

 극단적인 예지만 10억 원을 부도내고 2일만 황제 노역을 하면 다 죄를 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공정하지 못한 사회가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는 일당 5억 원, 누구에는 일당 3천 원의 부역이라면 이것은 당연히 공정하지 못한 불공정이다.

5억 원의 황제 노역이 사회를 들끓게 하자 검찰은 형 집행정지를 했고, 국민들의 공분(公憤)을 의식해서 출국금지도 하게 된다. 왜 문제가 되기 전에 미리 국민들의 공분적 요소를 제거하는 손톱 밑 가시를 제거하지 못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대통령은 강조했고, 장·차관은 시행하면 된다. 국회는 기준과 원칙에 의해 법을 만들고 수정하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모든 것은 남의 탓. 제 탓은 조금도 없고 남만 원망하는 불공정사회가 대한민국의 현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정의론」의 저자 존 롤즈(Jojn Rawls, 1921~2002)는 최대의 평등한 자유의 원리,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리에 의해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공정성(사회정의)은 상대적 개념이다.

 마이클 샌덜(Michael J. Sandel, 1953~)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정성에 대한 판단이 사안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대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비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사회 인식에다, 가진 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크기 때문에 더욱 공정사회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때로는 공정사회를 위해 해결사를 갈망한다. 그렇다고 영화처럼 해결사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게 법치사회다. 법을 집행하지 않는 방조된 불공정사회에서 영화의 주인공 엄마를 욕할 수는 없다.

공정사회라 함은 손톱 밑 가시를 빼주고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의사가 없어서, 의료보험이 없어서, 소독약이 없어서, 핀셋이 없어서 안 된다는 등 횡당한 법리(法理)로 가시 빼기를 늦추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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