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본질이라면 형식은 본질을 규정하는 틀이라고 했다.

술잔이 술이라는 내용물의 본질을 바꿀 순 없지만 다양한 형태로 술의 모양새를 규정한다. 결코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이기에 사람들은 술의 종류에 따라 걸맞은 술잔을 찾는다. 그리고 좋은 술을 좋은 잔에 부으며 외친다. “기분 좋다”라고.

내용과 형식의 환상적 조화로 인한 기분 좋음은 창조적 내용의 공연을 혁신적 형식의 무대에 담았을때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개회식이 열린 문학경기장 무대는 혁신을 넘어 파괴적이었다. 허공에 매달린 10개의 전광판이 돋보였고, 좌우 관람석은 과감히 없앴다. 관객으로 가득 채울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해 좌석을 줄여서 공백을 채웠다.

형식의 파괴는 관람객의 집중력을 높였고, 곧 공연 내용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대부분의 국제대회와 달리 선수단 입장이 개회식 전반부에 이뤄졌다. 박칼린 총감독은 이를 놓고 “‘내가 선수라면 개회식을 보고 싶어할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랬다. 어느 대회든 선수들이 주인공일 텐데 그동안 배제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박 감독은 선수들을 모두 불러놓고 공연을 펼쳤다.

공연을 준비한 주인장이 아닌 초대된 손님들을 위한 개회식은 성공적이었다. 선수들 모두 한데 어울려 축제를 즐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 대회 개·폐회식 비용은 54억 원 정도다. 지난 비장애인아시안게임 230억 원의 20%에 불과한 돈이다.
역대 최악의 개회식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비장애인대회는 적은 예산과 연습 부족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애인대회를 지켜본 이후부터 이 같은 말은 ‘비겁한 변명’이 됐다.

비장애인대회 개회식 실패는 돈과 시간 부족이 아닌 내용에 걸맞지 않은 형식의 선택, 형식에 어긋나는 내용 선정이 근본적 원인이다.

이날 개회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비장애인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의 수장은 반성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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