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림 인천대학교 영어교육과 강사

 며칠 전 여권을 찾으려고 구청에 들렀다가 지하 구내직원식당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됐다. 길게 한 줄로 섰던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배식대 가까이 와서는 두 곳으로 나눠서 셀프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70이 넘어 보이는 건장한 사람들 몇 명이 줄을 서지도 않은 채 배식대로 급히 들어왔다.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던 노인 한 분이 왜 새치기를 하느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그 강건한 사람이 위압적으로 큰소리를 치며 무엇이 잘못 됐느냐, 다른 배식대 줄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온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 까불면 때려 죽이겠다고 막무가내로 험악한 분위기를 보이자 나무라던 사람은 더 이상 상대를 하지 않았다.

험악한 기에 눌렸는지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너무나 당당한 이 위압자의 얼굴 표정에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탈취하고 본토까지 넘보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곧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곧 정의’인 무질서의 시대가 된 것이다.

러시아의 이러한 침략행위는 타국 영토를 군사력으로 차지할 수 없다는 법적 원칙에 기초를 둔 유럽의 안정적인 질서를 무력화시켰다.

러시아는 1552년부터 1917년까지 매년 평균 10만㎢에 달하는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푸틴은 구소련제국의 영광을 재현시키려는 민족주의에 매몰돼 있다.

한편, 아시아에서 중국은 남지나해에서 필리핀과 베트남과의 영토 분쟁으로 지역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리비아·시리아·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슬람국가(IS)단체 등에서 내란과 테러로 인해 야만적인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지구상에는 평화를 정착시킬 착한 세계 경찰과 마음 좋은 맏형(Big Brother)과 같은 해결사가 더 이상 없는 것인지?

왜 세계는 지금 이와 같은 무질서의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됐는가?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의 냉전 대립이 40년간 지속됐다. 냉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고, 미국이 지구상의 유일한 패권국이 됐다.

그러나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패권 지위를 약화시켰고 새로운 강자들이 패권 경쟁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을 비롯한 브라질·러시아·인도의 신흥국가들은 미국과 유럽이 2차 대전 이후 제정한 ‘브레턴우즈체제’의 세계 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패권 경쟁국가들은 기존의 체제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혜택이 그들에게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면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패권국이 되려는 국가는 세계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규칙을 강행할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하며, 주요 국가들에게 체제 유지가 호혜적인 편익을 제공해 준다는 공감대를 형성시켜 줘야 한다.

따라서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체제 국가들이 과연 패권국으로서 세계 질서의 유지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구현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다.

헨리 키신저는 최근의 저서인 「세계질서(World Order)」에서 규칙에 기반한 시스템이 도전을 받는 이유는 그 시스템에 대한 정의가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규범 일치의 부재는 시스템의 불안정을 가져오므로 세계 질서의 규범이 지도자들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지속가능하고 반드시 수용돼야 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과연 상이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통적인 질서이론을 유지하는 국가들이 공동의 시스템에 대한 적법성을 옹호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국제경제와 국제경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체제 간의 충돌이 세계 질서에 필요한 공동의 목표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키신저가 우려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에 대해 미국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는 지금 새로운 질서퍼즐 모색에 분주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안전 보장을 믿고 핵무장 해제와 재래식 군비 축소를 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경우를 냉철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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