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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부조리 맞서던 청년, 경제정의 실현에 청춘을 바치다

김송원 인천경실련 사무처장

이재훈 기자 ljh@kihoilbo.co.kr 2014년 11월 12일 수요일 제3면

 

   
 
인천지역 어디에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인물이 있다. 만화영화 주인공인 ‘짱가’가 아니라 인천의 경제 정의를 위해 청춘을 바친 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면 ‘신세 망친다’는 어른들의 등쌀에도 꿋꿋이 한길만 갔다. 그렇게 걸어온 세월이 20년 됐다. 오롯이 한곳을 지켜 온 그의 신념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고생했다며 ‘공로패’로 그를 격려했다.

‘20년간 경실련에 몸 바친 김송원 님과 가족의 헌신에 감사를 표합니다.’
공로패 끄트머리에 달린 ‘가족의 헌신’이란 글귀가 짠하다.

김송원(48)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을 만났다.

그가 앉은 책상 곳곳에 켜켜이 쌓인 서류철만 봐도 살아온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우리의 김 처장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선6기 인천 시정에 대한 ‘폭탄발언’이 날아들었다.

“유정복 인천시장이 ‘미스터 커터’로 불리는 배국환 정무부시장을 앉혔는데 재정난을 극복하고 인천을 살리겠다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기가 막힙디다. 자체 예산 70%를 절감하기 위해 1년 치 살림살이의 30%를 ‘일괄 삭감’하겠다는데 차라리 파산 선고를 하라고 했습니다.”

인천경실련 20년의 산증인이 된 것을 기사화하기 위해 만났는데, 재정난 이야기로 운을 떼고 말았다.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김 처장은 황해도 출신인 아버지와 경남 진주 태생인 어머니 품에서 자랐다. 대나무 제품을 만드는 아버지 사업을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에 왔다.

신흥초등학교와 대헌중, 인하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인하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민주화의 열망으로 학생 운동에 참여한 87학번 새내기 청년 김송원은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과감히 자퇴를 감행한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이어가기 위해 언제까지 진리와 학문만 갈구하는 상아탑을 맴돌 수 없었어요. 현장에서 민중이 살아가는 진짜 노동자의 땀방울을 흘리고 싶었죠.”
그렇게 노동 현장에서 값진 삶의 가치를 배우던 그에게 어느 날 YMCA 간사로 있던 후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를 위한 시민운동 조직이 있는데, 그곳에서 고민의 틀을 넓혀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이 오늘의 김송원 처장을 있게 한 출발점이 됐다.

경실련은 1989년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격변기를 딛고 출범한 대안적 시민운동 단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여전히 군사정권은 유지됐고, 정치적 억압 속에서 시민들은 빈익빈 부익부와 사회 부조리 속에 자유·평등·민주를 억압당했다.

인천경실련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92년 10월 10일 창립했다.

햇병아리 김 처장이 현재의 자리에 있기까지 버팀목이 되어준 이들도 적지 않다.

인천경실련 창립자인 오경환 인천경실련 고문부터 박영복 전 경인일보 사장, 송정로 전 인천in 대표, 김종화·은옥주·이국성·최계운·남흥우 등 역대 공동대표들까지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20년 역사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사건들도 많다.

1995년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의사결정 구조가 청와대보다 지방정부가 빠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줬다.

시민 목소리가 현실화 될 수 있는 지방분권이 제2의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사실에 김 처장 스스로도 큰 감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인천 경실련의 격동기를 이끈 계양산 종합위락단지 개발(1991년), 선인학원 사태(1992년),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비리사건(1994년) 등이 꼽힌다.

“재벌들이 부당하게 땅을 축적하거나 공무원들이 정치권과 유착해 저질렀던 부정부패 모두 경실련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죠. 때론 정부와 싸울 때도 많았어요. 굴업도 핵폐기장부터 영흥도 화력발전소, 인천LNG기지, 수도권매립지까지 고난의 도시 인천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어요.” 
최근 인천 경실련은 서해 5도섬 주민들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중국어선 불법 조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섬 주민을 위해 정부를 상대로 공익소송에 나서는가 하면 갓 잡은 고기를 제값에 팔 수 있도록 아라뱃길에 직판장을 여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이처럼 부단한 노력에도 김 처장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지역 패권주의’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심정이라고 했다.
   
 


영호남이 휘두르는 패권 정치로 인해 그 고통을 인천이, 인천 시민이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만과 항공, 산업단지 등 인천이 대한민국의 관문이라고 외치면 뭐합니까. 부산과 광양을 성장시키기 위해 인천항 발목잡고, 인구 300만이 넘어가도 여전히 대구와 부산에 밀리는 게 현실인데 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김 처장은 인천 정치권과 경제계, 인천 시민이 다시 한 번 똘똘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민단체가 인천시민의 지지와 성원을 받으려면 정치적 중립과 소신, 자본의 먹잇감이 되지 않는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도 전했다.

“야권연대가 참패를 당한 것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시민 사회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결국 시민이 원하는 사회운동을 하지 못하면 자신들만의 리그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왜 사람이 없느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거예요.”
끝으로 김 처장은 그의 오늘을 있게 해준 일등 공신, 가족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6남매 중 막내였던 아내와 결혼할 때 처가댁 반대가 심했습니다. 막내 동생이 시집가서 고생할까봐 그랬겠죠. 어렵게 견뎌왔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어 다행입니다. 딸 부잣집 아빠로 지금까지 버텨온 건 모두 아내와 아이들의 지지와 성원 덕분입니다.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시민운동 하는 사람은 가정적이지 않으면 집에서 쫓겨나기 십상’이라고요. 스스로 떳떳하게 살아왔다는 자존감 때문인지 딸이 시민운동 하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면 굳이 말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딸 자랑에 살짝 얼굴을 붉힌 ‘딸 바보’ 김송원 처장의 털털한 웃음 속에 인천의 밝은 미래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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