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비밀일수록 그 이야기에 공감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는 비밀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에 대한 위로가 간절히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밀회’는 차마 ‘밀애’라고 말할 수 없는 연인의 만남과 이별을 담고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감독이자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의 데이비드 린 감독의 초기 대표작 ‘밀회’는 1946년 제1회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을 통해 작품성과 예술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품이다.

비록 앞의 세 영화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데이비드 린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만큼 ‘밀회’는 멜로드라마의 고전으로 회자되고 있다

. 자신의 비밀을 진심으로 공유할 관객을 찾아 지금도 우리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어오는 작품 ‘밀회’를 만나 보자.

평범한 주부 로라는 행복한 결혼생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다정한 남편과 함께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로라의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다.

일주일 중 매주 목요일은 그녀에게 휴일과 같은 날로, 인근 번화가로 나가 쇼핑, 독서, 영화 관람 등을 즐기며 취미시간을 갖는다. 운명의 그날도 여느 목요일과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목요일이었다.

 저녁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하는 플랫폼에 선 로라는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끼고 역사 휴게실로 향한다. 눈 안에 티끌이 들어가 괴로워하는 로라에게 낯선 신사가 다가온다.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한 신사의 친절한 치료 덕에 로라의 눈병은 사라진다.

이날의 인연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게 된다. 단 한 번도 일탈을 꿈꿔 본 적이 없을 만큼 단정하고 모범적인 모습으로 각자의 가정을 꾸려온 이들이었지만, 서로를 향해 뛰는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다. 이성은 멈추라고 하고 있지만 가슴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반나절 동안 만나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대화하는 그 평범한 시간이 영원하길 바랄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의 맛이 진할수록 고통도 커져갔다. 떳떳하지 못한 현실과 영원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이들을 아프게 했다. 결국 헤어져 각자의 삶에 충실하기로 한 두 사람. 이들의 마지막 하루도 여느 목요일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란 괴로움에 아무 말도 못한 채 이별의 시간 앞에 놓이게 된다.

1945년 제작된 이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됐다. 그 흑백의 질감은 주인공의 모습과 그 사랑의 밀도와도 닮아 있다. 1940년대의 사랑은 느리고 아련했다. 약속이 어긋나도 연락할 길이 없어 몇 시간씩이나 상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두 사람이 사랑하는 그 시간을 섬세한 연출력으로 포착해 냈다.

 이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장을 통해 더욱 애틋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은 통속적인 불륜에 대해 도덕적인 꾸짖음이나 자기합리화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저 짧은 순간,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이들의 즐거움과 아픔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는 주인공 남녀의 묘사뿐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깊이 있게 표현되고 있다. 핑크빛보다는 회색 톤의 아픈 사랑 이야기. 세기가 바뀐 현재까지도 그 아련함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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