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하순 남도 여행 뒤 두 번째로 지난 주말, 또 남도를 찾았습니다. 그때는 한창 벼가 익느라 황금 벌판이더니 이번에는 추수를 마친 들판은 텅 비어 있고 아직 지지 않은 단풍이 홍황의 빛깔로 우리를 맞았습니다.

주말이면 북한산을 찾는 산악회 산우들이 남도의 늦가을 흥취를 느끼자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마침 광주박물관에서는 공재 윤두서(1668~1715) 서세 300주년을 기념하는 유작전이 열리고 있어 그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남 땅끝 미황사에서 템플스테이로 숙박을 하고, 도솔암까지 등산도 하고, 화순의 운주사도 구경하고, 강진 무위사의 탱화와 벽화, 선각대사의 웅장한 사적비까지 살펴본 뒤여서 여행의 맛이 도도하게 느껴지던 참이었습니다.

공재의 전시회로 끝나지 않고 공재의 아들 낙서(駱西) 윤덕희(1685~1776), 낙서의 아들 청고(靑皐) 윤용(1708~1740)의 3대(三代) 화가 전시회여서 더욱 의미 깊은 전람회였습니다.

공재는 조선 3대 화가로 너무나 저명하지만, 아들·손자까지 뛰어난 화가였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 그들, 고산의 높은 학문과 예술의 유전자를 받은 듯 그들은 모두 학문도 높았고 예술에도 뛰어난, 참으로 대단한 가문의 전통을 세상에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마치 추사가 글씨를 잘 쓰는 서예가로만 알려졌듯이 공재는 화가로만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그분의 외증손자인 다산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재께서는 성현의 자질을 타고나시고 호걸의 뜻을 지니셨기에 저작하신 것에 이러한 종류가 많습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고 했듯이 전시장에는 공재가 손수 베꼈던 일본 지도 1부, 조선 지도 한 폭까지 전시돼 공재의 박학다식한 학문영역을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시대를 잘못 만났고 수명까지 짧으셔 끝내 벼슬도 못하고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내외(內外) 자손 중에서 그분의 피를 한 점이라도 얻은 자라면 반드시 뛰어난 기상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역시 불행한 시대(남인들이 쇠락한 시대)를 만나 번창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자신의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 적어 놓았습니다.

아들 낙서나 손자 청고도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친증손자인 윤지범·윤지눌 등도 뛰어난 재주와 학문으로 문과에 급제했지만 고산 윤선도(남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크게 현달하지 못하고 궁하게 살다가 시들어진 점을 다산은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점의 피가 다산에게도 전해져 그만한 대학자가 나왔지만 역시 귀양살이 18년의 궁한 세월을 보낸 점은 또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산은 「발취우첩(跋翠羽帖)」이라는 글에서 공재·낙서·청고 3대 화가들에 대한 그림의 평을 참으로 격조 높은 글로 기록한 바가 있습니다.

공재는 외증조, 낙서는 외백조, 청고는 외가 아저씨가 되는데, 그들에 대한 화평은 고전적인 글임에 분명합니다.

 “낙서의 작품으로 꽃·나무·새의 깃, 짐승의 털, 모든 벌레 등은 그 참모습과 핍진하게 같아 정연하고, 섬세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하니 이야말로 몽당붓으로 수묵을 칠하여 그릇되이 기괴한 것을 그려 놓고는 ‘스스로 나는 뜻을 그린 것이지, 외형을 그린 것이 아니다’고 자부하는 하찮은 화공들의 작품과는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라고 평해 공재 집안의 문인화는 일반 화공들의 그림과는 다르게 묘사의 기법도 탁월하지만, 거기에는 학문과 철학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평했습니다.

우리는 국보인 공재의 자화상 진품을 보고 또 보면서 다산의 평이 과장이 아님을 여실히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 남도 여행에서는 자유의 그리움을 느낀 것처럼, 이번에는 예술의 높은 경지에서 찬탄을 금하지 못하다 돌아온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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