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 작품은 온전히 작가의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과 만나게 된 후 작품은 더 이상 작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작품이 지닌 의미는 대중의 이해와 해석 속에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6년, 남북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양분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극단적 비난의 대명사였으며, 이와 동시에 기존 문화와는 여러모로 이질적이었던 미국의 물질문화도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도 없는 시대였다.

이런 혼란기에 등장한 한형모 감독의 영화 ‘자유부인’은 1954년 정비석 원작의 동명 소설이 지난 파급력을 뛰어넘는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대한민국의 첫 베스트셀러로, 첫 흥행영화로 손꼽히는 영화 ‘자유부인’을 만나 보자.

오선영은 교수 부인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주부로 보내는 일상이 무료했던 그녀는 지인의 부탁을 받아들여 양품점의 매니저로 취직하게 된다. 집안 살림밖에 몰랐던 선영이었지만 사회경험을 쌓아 가며 몰랐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단아했던 한복 대신 몸매가 드러나는 양장으로 갈아입고, 블루스와 재즈 음악이 가득한 댄스홀에서 춤을 추는 선영은 어느덧 낯선 남성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재미없고 따분한 남편 대신 ‘애인’을 만들 줄도 아는 선영은 최신의 현대 여성이었다. 그러나 선영의 질주하던 자유도 결국 그 끝이 밟히면서 추락하고 만다. 아이와 남편이 있는 가정을 버리고 화려한 빛을 쫓던 선영의 불나방 같던 한때는 하얀 눈밭에 무릎을 꿇는다.

영화 ‘자유부인’은 새로운 문화의 도입 시기에 기존의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폭로한 작품이다. ‘자유부인’은 표면적으로 ‘돈푼깨나 있다는 유한부인’에 대한 비판 소설임을 원작자 정비석이 밝힌 바 있듯, 전후의 사회변화에 내제한 불안을 여성의 성적 타락과 도덕심의 붕괴를 통해 비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화제의 중심에 선 연유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은 독자 및 관객들의 괴리에서 기인한다.

소설 연재 당시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는 “중공군 50만 명과 맞먹는 국가의 적”이라는 위험천만한 작품으로 선정했으며, 일부에서는 남한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북한의 사주를 받고 완성된 소설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이러한 격렬한 평가의 기저에는 모던타임즈라는 현대의 이름 아래 변화되는 사회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 그로 인한 방황과 일탈이 대중들에게는 자기합리화를 위한 탈출구로 읽혀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향락을 추구한 여성에 대한 비난에 앞서 그 여인의 불안한 현재를 공감한 대중의 지지가 이 작품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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