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인천 언론은 어땠을까? 1970년대 유신정권의 ‘1도 1사’ 언론정책으로 ‘암흑기’를 맞았던 인천 언론은 1980년대 들어 기호일보와 인천신문의 탄생으로 15년 만에 지역의 목소리를 담게 된다. 이후 현재까지 인천에 본사를 둔 기호일보, 인천일보를 비롯해 경기도에 본사를 둔 경인일보, 경기일보, 중부일보 등이 인천지역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유난히 부침이 많았던 인천지역 언론사 40년을 돌아보자. <편집자 주>

# 1970년대 인천 언론의 ‘암흑기’

▲ 경기지방 3개 신문사 통합 기념행사

기호일보의 전신인 경기교육신보가 창간한 1970년대는 인천 언론의 암흑기다.

박정희정권은 1973년 ‘1도(道) 1사(社) 언론정책’에 따른 ‘경기 3사 통폐합’을 진행한다. 이에 따라 1960년대부터 인천지역 언론사로 자리잡았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연합일보, 경기일보는 태풍을 맞게 된다.

인천시와 인천언론인클럽이 발행한 「인천언론사」에서는 당시를 ‘인천 언론 암흑의 70년대’라고 평한다.

당시 인천 언론인의 자존심이라고 불렸던 경기연합일보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주가 바뀌고 본사를 수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연합일보는 두 개의 신문을 통폐합시켜 가져가 버리니 졸지에 인천에 언론은 사라지게 된다.

통폐합 당시 경기매일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김형희 씨는 ‘인천언론회보’ 제16호(2003년 8월자)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는 통합이라는 미명 하에 1973년 8월 31일 연합신문 사장에 의해 강탈당했다. 이로써 인천은 신문사 없는 도시가 됐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탈법의 현장에서 무엇을 했던가. 불법자의 폭력에 너무나 연약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 수행의 요식행위에 순응하는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정부의 ‘1도 1사’ 언론 정책에 따라 경기3사통합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합의’가 이뤄진다. 그해 7월 31일에는 올림포스호텔에서 ‘3사 통합대회’가 열리고 ‘발표문’과 ‘성명서’를 낭독해 3사 통합이 공식적으로 이뤄진다.

당시는 사이비 기자의 범람으로 언론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었고 정권에 길들여져 가던 시기였다. 유신정권의 ‘강압’에 의해 언론 경영자들이나 종사자들은 가슴만 쳐야 했고, 지역 유지 등은 몇몇이 모일 때마다 통폐합을 얘기하며 심하게 반발하는 분위기였다고 「인천언론사」는 적고 있다.

때문에 이후 15년 동안이나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사가 없는 언론 공백 시대가 진행된다.

3사가 통합된 이후 수원시 교동에서 경기신문이 창간한다.

▲ 경기교육신보 창간호.
경기신문은 1도 1사라는 유례없는 좋은 여건 속에서 날개를 단다. 기자들을 새로 뽑고 사옥을 증축한다. 매일 4면씩 발행하던 지면은 격주 8면 발행으로 늘었고, 1977년 창간기념일을 기해 매일 8면으로 발행 면수를 늘려갔다. 또한 인천국을 인천분실로 승격시키고 중구 항동 4가 전 인천전매청 건물을 매입해 별도의 사옥을 마련, 직영체제로 운영하게 된다.

이후 사세를 더욱 확장한 경기신문은 신문 이외에도 ‘경기연감’, ‘경기교육연감’, ‘경기교육화보’ 등 출판사업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 경기교육신보의 창간
인천에 뿌리를 둔 신문이 하나도 없는 ‘암흑기’ 동안 언론인들의 몸부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잡지를 발간해 언론을 대신해 보려 애쓰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주간지를 창간해 인천의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런 시도 속에서 1975년 10월 10일 태어난 언론이 바로 ‘경기교육신보’다.

언론 공백기를 맞아 모두 허탈해 있을 때 비록 주간지지만 ‘경기교육신보’가 창간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전국에서 어떤 일간지나 주간지도 창간이 허락되지 않고 있었는데, 때문에 교육관계 특수지를 내세워 당국의 허가를 받아내는 ‘편법’을 동원하게 됐다.

서강훈, 김경룡 등이 주축이 돼 10월 10일 창간호를 발행한 경기교육신보는 유신 이후 전국에서 신문잡지로는 처음 창간하는 기록을 갖게 됐다.

당시는 ‘인천공보’가 시청 회보로 들어가고, ‘주간인천’이 인천신문으로 탈바꿈하면서 이렇다 할 주간지가 없었던 상황. 특수 주간지이긴 하지만 인천의 끊어진 언론의 맥을 잇고 유일한 인천의 언론기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교육 총화의 기수’를 사시로 내세운 경기교육신보는 창간사에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청에 따라 향토 교육문화의 공기로서 향도적 역할을 맡아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인천에서 뜻 있는 행사를 해도 보도하는 신문이 없어 불편해하던 문화단체들은 경기교육신보에 보도를 요청하는 등 신문의 대안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이 주간지가 모태가 돼 1988년 탄생한 것이 ‘기호신문’이다.

▲ 언론인친선축구대회.

# 1980년대 인천 언론의 ‘봄’
1970년대가 인천 언론의 ‘암흑기’였다면 1980년대는 인천 언론의 ‘봄’이라고 불린다.

정부는 1987년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6·29선언’을 하게 된다.

6·29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자유 언론의 창달’이 담겼고, 지역에서는 기호신문과 인천신문이라는 열매가 맺어지게 된다.

1988년 7월 20일 중구 중앙동 1번지에서 ‘기호신문’이 탄생한다. 유신 시기 말 못하는 도시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꽉 막힌 숨통을 열기 위해 발행됐던 ‘경기교육신보’라는 특수 주간지를 바탕으로 보다 쉽게 일간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호신문은 수도권(옛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경인지역의 중추적인 언론으로 소명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기호신문은 공정과 책임, 정론, 진실을 사시로 내세우고 일간지를 제작하는 편집1국과 월간 화보 ‘수도권’을 만드는 제작2국을 뒀다. 또한 총무국과 업무국, 공무국 등 조직을 가능한 한 줄였으며, 취재 인원도 소수정예로 시작했다.

이후 당초 1일 8면에서 16면으로 지면을 늘렸고, 속출하는 주간지들과의 구분을 위해 창간 4개월 만인 1988년 11월 28일 ‘기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1992년 3월 1일 보도한 ‘일제 살육의 현장’ 기사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기호일보가 입수한 한인 작두 처형 사진 10여 장은 당시 일제의 잔학성을 세상에 다시 한 번 폭로한 생생한 자료였으며, MBC와 KBS 등 방송을 통해서도 소개됐다.
이에 앞서 1988년 7월 15일에는 인천신문이 출범했다.

▲ 기호일보 사옥.
인천신문은 사시로 ▶애향심 제고 ▶공동체 구축 ▶독자성 창출 ▶공정성 견지 등 4개 항을 내세웠다. 3사 통합으로 수원(경인일보)에 가 있던 많은 기자들은 ‘고향’을 찾아 인천으로 옮기게 됐다.

인천신문의 창간은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전국 최초의 신생 신문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인천언론사」는 “인천인들이 지역에 뿌리를 둔 신문 창간을 목말라 했고, ‘경인일보’ 인천지역 주주들이 인천지역에 언젠가는 신문이 창간돼야 하고, 창간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준비해 온 결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천신문은 창간 2주년 즈음인 1990년 7월 5일 ‘인천일보’로 제호를 변경했다.

현재는 인천에 본사를 둔 기호일보와 인천일보가 인천지역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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