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일보가 1975년 10월 10일 ‘경기교육신보’로 첫 출발할 당시 인천체육은 격동기였다.

선수들이 없어 체육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모아 선수로 뽑았고, 굶주리며 운동하던 시절을 지나 한국전쟁으로 동족의 아픔을 같이 했던 인천체육이 서서히 반석에 올랐던 시기가 바로 1970년대였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체육을 장려했고, 1978년 인천은 당시 경기도 소속으로 1964년에 이어 두 번째 전국체전을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격동기를 이어갔던 인천체육을 과거와 현재, 앞으로의 전망 등으로 나눠 알아본다. <편집자 주>

# 인천체육의 태동

   
 

한국 근대스포츠 최초 도입은 인천 제물포항의 개항과 함께 시작된다.

당시 도입된 근대스포츠는 인천을 통해 전국으로 보급됐다. 인천은 근대스포츠의 첫 시작점이자 체육의 중심도시였다.

인천은 단순히 근대스포츠를 전파하는 가교 역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도입과 성장, 전파와 성장의 역할까지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도시였다.

이 같은 인천체육의 태동은 광복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지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 무역이 최초 이뤄졌으며, 이곳을 통해 국민스포츠인 축구와 야구가 최초 도입·시작됐다.

인천체육은 일제 탄압 속에서도 ‘한용단’이라는 청년단체가 야구를 중심으로 각종 스포츠활동을 전개하며 민족주의적 체육활동에 중심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주 활동무대가 됐던 웃터골운동장은 인천시민의 민족적 체육성지였다.

특히 광복 이전 인천에는 이미 ‘인천체육회’가 존재했으며, 인천의 학교체육활동은 운동회 등을 통한 민족주의적 체육활동이 주류를 이뤘다.

광복 이후 1960년까지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됐다. 중심에는 인천체육회의 후신인 ‘인천체육협회’의 주도적 활동이 있었고, 인천공설운동장이라는 체육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있었지만 어려움 속에 인천체육관과 사동체육관 등의 사설 운동체육관이 존재하며 인천체육을 유지시켰다. 특히 이 시기의 인천야구팀은 전국 최강팀으로 ‘구도인천’의 명성을 드높였다.

# 인천체육의 성장과 인천시체육회
‘경기교육신보’ 창간 기점인 1961년부터 1980년까지 인천체육은 정립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출범한 제3공화국은 위축된 정통성과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체육활동을 크게 장려, 우선 전국체전을 크게 활성화시킨다.

인천은 이런 정부시책에 빠르게 부응하며 경기도 소속으로 1964년과 1978년에 각각 제45회와 제59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고, 이때 인천은 전국체육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숭의종합경기장을 비롯한 여러

   
 
체육시설을 건립하면서 인천체육이 발전할 수 있는 근간이 됐다.

1981년부터 2000년까지 인천체육은 급격히 성장한다. 서울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로 국가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던 시기로, 인천에서도 과거 ‘경기도 속의 작은 도시 인천’이 아닌 ‘인천직할시’로 새롭게 승격되면서 독자적 성장을 하게 됐다.

이 같은 성장 속에 인천시체육회와 인천시생활체육협의회가 출범했고, 보다 체계적으로 인천체육이 발전하게 됐다. 또한 각종 프로스포츠가 새롭게 출범했고, 이와 함께 각 종목별로 실업팀이 증가해 체육 발전의 근간이 되는 학교체육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인천시체육회는 1981년 전만 해도 인천이 경기도에 속해 경기도체육회와 함께 모든 체육활동과 체육행정을 펴 왔다. 당시 경기도체육회가 인천에 있을 정도로 인천체육 역시 규모 면에서 다른 지역에 뒤지지 않았다.

인천이 1981년 7월 1일 경기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체육회도 경기도체육회에서 ‘인천직할시체육회’로 독립했다.

국민체육 및 지방체육 진흥으로 시민의 체력 향상과 건전하고 명랑한 기풍을 진작시키고, 가맹경기단체를 통할 지도하고 우수한 경기자를 양성하는 설립 취지 아래 대한민국 체육 및 경기도 체육의 근간을 이뤘던 ‘인천체육’이 법률 제3424호 지침에 의거 ‘인천직할시체육회’로 출발한다.

그리고 그해 7월 14일 인천 초대 시장인 김찬회 시장이 당연직 인천시체육회장으로 5명의 부회장, 1명의 사무국장, 20명의 이사, 2명의 감사 등으로 인천직할시체육회 초대 이사회가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인천체육의 모든 것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83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인천에서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제64회 전국체육대회’를 처음 단독으로 개최하면서 인천체육이 한 단계 올라간다.

# 인천체육의 현재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천체육은 세계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새롭게 건립된 국제 규모의 인천문학경기장과 삼산월드체육관 등은 세계화의 토대가 됐다.

   
 

이러한 국제적 체육시설을 토대로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5년 제16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등의 국제적인 스포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특히 지방의 주요 도시들과 함께 개최한 2002년 한일 월드컵 인천 경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전래지에 대한 경축행사였으며, 제16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는 북한의 참가로 평화와 화합을 위한 뜻깊은 체육행사가 됐다.

인천체육은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의 인천 개최로 세계화 도약의 정점을 기록했다.

한국에서 세 번째이자 역대 아시안게임 가운데 가장 많은 1만4천5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인천아시안게임은 참가 선수들의 뛰어난 경기력과 풍성한 기록, 최첨단 경기시설과 선수촌 운영, 사고 없는 안전한 대회, 앞선 대회들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둔 대회 등으로 아시안게임 롤모델로 평가받았다.

또한 평화와 화합의 제전으로 불렸던 인천아시안게임은 북한 선수단이 참여하는 등 45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원 전 국가가 출전한 퍼펙트 대회로 스포츠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인천아시안게임에 이어 곧바로 ‘열정의 물결, 이제 시작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도전과 극복의 감동을 선사

   
 
한 ‘제11회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역시 총 41개국 6천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 1975년 장애인아시안게임이 창설된 이후 역대 최대 규모로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런 국제스포츠대회 개최로 인해 인천체육은 비로소 국제스포츠도시로 도약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지키는 일이다.

 

# 인천체육이 가야 할 길
인천체육의 과거는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인천이 세계로 도약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쉽게 이뤄진 것은 더욱 아니었다.

암울했던 일제 탄압 속에 인천체육인들은 애국을 위한 민족주의적 체육활동을 꾸준히 지속했고, 타국의 강제로 제물포항이 개항됐으나 청년단체와 학교의 다양한 체육활동은 인천의 원동력이 됐다.

누구나 모방은 할 수 있어도 역사를 통한 경험은 쉽게 따라 할 수 없다. 이제 인천은 인천만의 경험으로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역사를 바탕으로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의 국제스포츠 개최에 큰 영향을 미친 인천체육이 세계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스포츠문화 도입·활성화, 시민들의 스포츠 인식 전환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

현재 세계 스포츠는 과거 1등만을 위한 스포츠를 벗고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스포츠로 탈바꿈하고 있다.

세계로 도약하는 인천과 미래의 역사 앞에 인천시민 모두가 당당하도록 하나돼 인천체육에 힘을 실어 줘야 한다. 인천체육이 있기에 시민이 행복하고,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인천체육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지원과 동참으로 인천체육 발전에 주체가 돼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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