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김창수(77)원로는 27살이 된 1966년 언론에 첫발을 들였다.

침착하고 조용한 김 원로의 평소 몸가짐을 다소 걱정했던 친·인척이 “대담해져라”라는 주문과 함께 언론사 취업을 권유했다. 김 원로 스스로도 2~3년 짧은 기자생활을 통해 사회 경험을 쌓은 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길 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기자는 물 흐르듯 40년 세월을 훌쩍 넘어 평생 직업이 됐다. 김 원로에게 기자는 천직이었다. <편집자 주>

# 격동의 시기-현장에 있다.

   
 

1970·80년대 신문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정보통신을 기반으로 발전한 인쇄기술은 신문의 외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신문에 담기는 내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엇비슷하다. 권력자(기관)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순기능은 여전히 신문이 존재하는 근본 이유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경기일보’(1966년 경기일보는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다) 1기로 입사한 김창수 원로가 갖는 사회적 신념도 이와 같다. “활기찼지. 당시 1기 동기들이 5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열정이 넘쳤어.”
김 원로를 포함한 5명의 동기들은 도청(인천·경기 통합)을 비롯해 경찰국, 농협 등 굵직한 주요 기관을 출입했다.

20대 파릇한 젊음과 패기로 뭉친 이들에게 세상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적어도 1970년대 초반부터 불어닥친 언론에 대한 집권세력의 구조적 통제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들의 무대였다.

김 원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73년 인천에도 군부의 언론 통폐합이 강행됐어. 하루하루가 살얼음이었고, 많은 선배들이 강제로 해직되는 걸 보며 울분을 삼켰지.”

경기일보·경기매일·연합신문으로 대표됐던 인천과 수원에서 발행된 3개의 신문은 1973년 수원에 본사를 둔 경기신문으로 통폐합됐다.

「한국신문역사」는 당시 권력기관에 의해 자행된 언론의 흑역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방신문의 일도일사(一道一社) 원칙에 따른 통합, 정부기관 출입기자의 감축과 기자실 축소, 프레스카드제가 실시됐다. 1980년 8월에는 전국 언론사의 종업원 대량 해직, 신문사 지방주재 기자 폐지, 정기간행물 172종 무더기 등록 취소, 신문·방송·통신의 통폐합이 강행됐다. 그러나 1987년의 6·29선언으로 언론은 자율화 시대로 들어섰다.’

1988년, 지금의 언론사로 지방신문이 재편되기까지 암흑기를 거치는 사이 김 원로의 1기 동기 중 2명이 현직을 떠난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는 “1도 1사 정책에 따라 언론사가 수원에 본사를 두자 인천은 주재로 전락하며 천덕꾸러기가 됐다”며 “현재까지도 이 같은 현상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씁쓸함이 돈다”고 말했다.

# 언론의 길-시민에게 찾다.

“신문의 역할은 시민 기대에 부응하는 데 있다.”
지역신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묻자 “시민에 해답이 있다”는 짧지만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민 열망을 모아 태동한 지역신문의 숙명과도 같은 지극히 평범한 답변이지만 내포된 의미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는 “요즘 후배들은 신문사 기자를 직장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신문기자는 단순히 생계 유지 수단의 직장인 개념을 넘어 사회선도자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갖는다”고 꼬집었다.

과거 시민들의 눈과 귀를 대변해 권력기관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고, 사회 변혁을 주도했던 신문기자의 자긍심이 현재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권력기관의 하수인 노릇을 자청하며 권력자에 빌붙어 생명을 영위하는 행태가 만연한 현재의 상황이다.

“우리는 정말 고생하며 신문을 만들었어. 권력기관과 투쟁해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이 현재의 언론 자유야.”
1973년 편집국장 옆 자리에는 항상 정보국(현재의 국정원쯤 되겠다) 직원이 지키고 있었다. 신문 마감이 끝나면 정보국의 승인을 받아야 인쇄를 할 수 있었다. 당시 경기일보가 있었던 중구 항동 사옥에는 1개 분대의 군인이 주둔하고 있을 정도였다.

군부의 언론 침해는 갈수록 심해졌고, 수많은 언론인이 현직을 떠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억압 속에도 언론은 희망을 쏟아냈고, 결국 1987년 민주화 항쟁에 이어 1988년 언론자유화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김창수 원로는 “모든 것이 시민들의 힘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시민은 지역신문의 어머니와 같고, 지역신문은 시민의 나팔수와 같다”고 말했다.

# 기자의 길-덕(德)
“기자는 덕이 있어야지. 기사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개인이 갖고 있는 인격적 덕이야.”
김창수 원로가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는 후배 기자들에게 던지는 당부는 바로 ‘덕’이다.
‘덕’의 사전적 의미는 ‘도덕적·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이다.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캐내어 세상에 알리는 기자활동 과정에서 도덕적 양심에 어긋나지 말라는 뜻이다.

“한때 기자직을 두고 ‘무관의 제왕’이라 불렀지.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무척 싫어해.” 사회의 머슴으로 뛰어다녀도 부족한 기자에게 ‘제왕’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김 원로는 “선배들 중 일부는 한량처럼 지내기도 했지만 결코 기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며 “작아도 자신만의 소신을 토대로 긴 호흡을 갖고 기자생활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1980년대 활동한 일부 기자의 모습은 한량과 다름없었다. 1도 1사 정책으로 지역 언론사 상당수가 지역에서 퇴출됐고, 당연히 현장에서 활동하는 신문기자 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군부는 각 도를 대표하는 언론에 한해 기자를 인정하는 증명서를 발급했고, 기자증은 사회적 지휘 상승을 말해 주는 허가증과도 같았다. 일부 몰지각한 기자들은 기자증을 악용해 자신의 편의를 제공받으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이비 기자’라는 단어가 생긴 것도 바로 이때였다.

김 원로는 “취재원(공무원)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기자도 있었지만 많은 기자는 신념을 갖고 일했다”며 “당시 기자는 한여름에도 품위를 지키기 위해 넥타이에 정장을 반드시 갖췄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주문하자 김 원로는 뜻밖에도 ‘건강’에 대해 입을 열었다. 마감시간에 쫓기고 바쁘게 생활하다 보면 자칫 건강을 잃기 쉬운 기자직 특성에 대한 걱정 섞인 말이다.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나도 기자생활에서 건강이 많이 상했어. 연말연시에 술자리가 많을 텐데 몸 챙겨야 해.”

◇김창수
▶1939년 황해도 해주 출생
▶서울대 신문대학원 수료
▶1966년 경기일보 입사
▶현 ㈔인천언론인클럽 상임부회장

배인성 기자 isb@kihoilbo.co.kr
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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