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역사는 인천에서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개항 역사를 지닌 인천항과 전세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인천공항,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자유구역인 송도·청라·영종국제도시까지 그 면면만 봐도 인천의 경제적 가치가 여실히 입증된다.

남동인더스파크와 주안·부평국가산업단지는 그 중에서도 단연 백미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중공업 시대를 연 출발점이 인천이고,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경제 부흥을 이끈 곳 역시 인천의 산업단지였기 때문이다.

IT·BT 등 최첨단 산업이 주류를 이끌고 있는 요즘, ‘목재산업’과 ‘철강’으로 대한민국 산업 발전을 주도했던 인천경제 부흥기 대표 인물을 만났다. 선대에 이어 3세 경영까지 일궈 낸 인천 목재산업 역사의 산증인, 이경호(64)목재산업단체총연합회장(영림목재 대표)이 그 주인공이다.

 
# 40년 전 미생 ‘장그래’와 180도 다른 삶을 산 사람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프로 바둑기사에 입문하지 못하는 좌절을 맛본 뒤 고졸 학력에 무역상사에 입사해 결국 제2의 인생을 여는 데 성공한 장그래. 오늘을 살고 있는 또 다른 장그래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인생 역전 스토리로 드라마 종영 뒤에도 여운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런 장그래 스토리가 있는가 하면 이경호 회장은 꼬박 40년 전 180도 다른 인생을 택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최고 엘리트만 입사했던 전자회사를 과감히 정리하고 고인이 된 부친의 뒤를 이어 한평생 ‘나무’만 바라보고 있다.

“선친께선 원래 평양의 제재소에서 톱 수선을 하던 기술자였어요. 피붙이 하나 없는 남으로 내려와 이런저런 사업을 하시다 결국 다시 가장 잘하시는 목공소를 차리셨죠. 군 복무를 마치고 대우전자와 동양정밀을 오가며 승승장구했지만 아버지가 쓰러지시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아버지께서 못다 이룬 ‘대업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무쟁이’가 됐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지 않던 스물여덟 청년은 그렇게 인천경제계에 발을 디딘다.

이 회장이 선친을 이어 맡은 ㈜영림목재는 당시만 해도 소규모 목재상에 불과했다.
그 시기 목재산업의 메카로 군림한 인천은 대한민국 목재산업의 부흥을 이끌고 있었다. 대성목재와 선창산업을 양대 산맥으로 인천에는 수백 개의 목재업이 활기를 띠었고, 협력업체만 수천 업체에 육박했다.

중공업과 제조업 역시 꽃을 피웠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굴지의 공장이 생길 때마다 빠짐없이 인천을 찾아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정도다.

1960년대 말 인천 부평과 주안 일대에 인천기계공업공단이 생기고, 인천제철과 인천중공업이 합병되는 지각변동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세계를 주름잡던 인도네시아산 원목이 처음으로 인천항을 통해 수입된 것도 이 무렵이다.

# 인천 목재산업 흥망성쇠, 인천경제와 맥을 같이하다
영림목재는 샘표식품 납품을 하며 사업이 크게 성장했다. 1980년대 산업화 바람을 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간장을 사서 먹는 소비자가 늘었고, 샘표에 간장 상자를 공급하던 영림목재도 승승장구했다.
이 회장은 성장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목재상자 납품에만 만족할 수 없어 특수목 분

   
 
야에 뛰어든 것이다. 그때 인연이 닿은 곳이 영창과 삼익악기다. 피아노나 기타 제작에 필요한 원목을 공급하면서 사업을 늘려 나갔다.

“지금은 인천을 떠난 삼익악기가 부평공단에 있었고 풍산금속과 동서식품, 대우자동차도 1980년대 초반 인천을 주름잡았죠. 목재단지는 중·동구 인천제철 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는데 이후 ‘합판’ 붐이 일면서 인천산업단지 곳곳으로 목재 관련 사업이 무섭게 번져 나갔어요.”
당시 설립된 이건산업과 동화기업은 현재까지 부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무서울 것 없던 목재산업도 목재 파동과 IMF, 세계 금융위기 등의 부침을 겪으며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나무를 대신해 플라스틱이 등장했을 때도 위기가 컸다.

목재산업에서 가장 먼저 철수를 선언한 곳은 세계 일류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삼성이다. 당시 삼성 역시 인천시 동구 만석동에 목재사업부를 두고 대단위 투자를 했는데, 1970년대 말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다.

“신흥목재와 공신목재 등 잘나가던 업체가 많았죠. 합판이 무너지더니 플라스틱이 장악했고, 목재산업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신기한 건 눈치 빠른 삼성이 일찌감치 목재산업에서 손을 뗀 거죠. 운이 좋았는지, 선견지명인지 삼성은 삼성이었어요.”
목재산업이 쇠락기를 걸은 반면 철강과 제조업은 날개를 단 듯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며 비디오와 CD 판매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은 새한미디어 역시 이 회장이 근거리에서 지켜본 인천경제지형 변화의 한 사례다.

# 인천경제 미래 먹을거리, 무엇이 됐든 ‘신의(信義)’가 있어야
제일제당, 한일방직, 한국기계, 삼미, 인천종합어시장, 한국화약, 인천조선㈜, 부평지하도상가, 대우그룹, 경기은행, 희망백화점, 인천백화점, 남동국가산단, 인천공항, 송도국제도시, 인천대교. 이름만 들으면 인천의 산업 발전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대표 업체와 사례들이다.

   
 

이 회장은 이들 업체가 인천에서 일궈 낸 역사를 오늘의 인천경제를 있게 해 준 보석 같은 존재로 평가하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우그룹이 폐망하고 그 자리를 미국 기업인 GM이 대체하고, 갯벌이 메워져 그 자리에 우리나라 현존 초고층 건물과 다국적 기업이 들어서는 순간이 이 회장에게 주마등처럼 스친다.

신기원 같은 인천공항이 생기고, 남동인더스파크를 포함한 산업단지가 인천 곳곳을 차지했다. 물론 그 사이 인천을 떠나 지방으로 둥지를 옮겨간 업체도 여럿이다.

인천경제의 과거와 현재, 역동의 40년을 함께 걸어온 이 회장은 “앞으로의 먹을거리는 ‘신의(信義)를 생각하는 기업가 정신’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샘표 회장님이 항상 강조하던 말씀이 있었어요. 기업이 성장한 만큼 다른 경쟁업체와 협력업체, 근로자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요. 인천에 15만 상공인이 있어요. 어떤 기업이 장수하고 어떤 기업이 단명할지 모를 일이지만 큰 욕심 부리지 않고, 기업인과 근로자가 함께 지켜야 할 믿음과 신뢰만 굳건하다면 인천경제의 앞날도 그만큼 눈부실 거라 믿습니다.”

이경호 회장 약력
▶1950년 황해도 장연 출생
▶1968년 인천고 졸업
▶1974년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1974년 대우전자 무역부 입사
▶1976년 동양정밀 입사
▶1978년 영림목재 대표이사 취임
▶2003년 와세다대 대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과 외국인연구원과정 수료
▶2006년 고려대 노동대학원 최고지도자과정 수료
▶2009년 산림사업유공자 산업포장 수상(대통령 포장)
▶2011년 세종대 경영전문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2009년~현재 목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2014년 4월~현재 목재산업단체총연합회장

대담=한동식 정경부장 dshan@kihoilbo.co.kr
정리=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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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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