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명절이 되면 아이들은 뜨끈한 아랫목에 둘러앉아 할아버지가 해 주시는 옛이야기를 듣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노란 호박고구마를 까 먹으며 할아버지 말씀에 밤 깊어 가는 줄 모른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이제는 수년만 지나도 바다가 메워진다. 판잣집이 사라지고 고층 빌딩이 들어선다.

지난 40년, 특히나 문화예술인들의 낭만은 줄어든 판잣집만큼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인천의 문화예술과 함께해 온 김윤식(67)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가 구수하게 풀어내는 인천문화 40년을 돌아보고 향후 인천문화의 발전가능성도 들어보자. 자, 달달한 군것질거리인 호박고구마가 준비됐다면 손주가 초등학생 입학을 앞두고 있다는 김윤식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주>

-다음은 글쓴이 말-
# 70년대, 예술인의 아지트 신포동
대학을 근 10년 동안 다녔나봐. 가정이 어려웠거든. 75년도에 졸업했는데 뭘 할까 고민했지. 문학도 문학이지만 취직을 해야 하잖아. 선생으로 취직한 사람은 안정적이지만, 우리처럼 선생 포기한 사람은 직업 일선에 나서야지.

   
 

대학 졸업해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 다녔어. 학생 때부터 신춘문예에 집어넣는데 뚫지를 못했어. 그때 많이 자존심 상했어. 직장 다니면서 틈틈이 했는데도 결과는 똑같았지.

79년에 동인지는 아니고 비슷한 잡지에 발표가 됐어. 그걸 등단으로 하기는 또 자존심이 상하는 거지. 서울에서 여기저기 회사 다니다가 정리하고 83년 인천에 있는 영진공사에 들어갔지.

아마 79년부터 84년까지는 글만 썼어. 거지생활한 거지. 79년부터 신포동 생활을 시작한 거야.

그때는 인천의 중심지가 중구였어. 지금 중구청 자리에 인천시청이 있었잖아. 공무원들도 퇴근하면 신포동으로 모이는 거야. 아마 다방만 한 30개 됐을 걸? 동인천까지 하면 한 50개 됐을 거야. 인천에 100개의 다방이 있다면 50개가 중구 신포동과 동인천에 있던 거지.

다방이 문화예술인의 아지트야.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옥 선생이 있었어. 작곡한 최영섭 선생은 70년대 초부터 왔고. 이경성 인천 초대 박물관장, 그 양반도 은성다방서 있었지. 은성다방이 지금 신포동 게스(guess) 옷가게 2층에 있었어.

일본식 건물인데 계단도 나무였지. 바닥도 나무. 석유걸레로 닦았어. 거기가 문화예술 1번지였어. 이경성 선생, 문화평론가 김향수 선생, 인하대 부총장이자 시인 조병화 선생. 우리 은사인 최승렬 시인, 한상옥 선생, 인천문화원장 김길봉 그리고 시인들도 많이 왔지.

그때 난 학생 때니까 어른들 오면 숨도 못 쉬었어. 낭만적인 곳이야. 모든 문화예술인들이 신포동에 오는데 글쟁이들은 거의 낮부터 나와 있는 거야. 일부는 저녁 때 나오고. 그땐 공무원들도 오지. 그림, 글 쓰는 분, 음악하는 분, 죄다 나와.

특히 백항아리에 모였어. 선술집이야. 지금은 인삼가게가 됐는데. 내가 그 집을 처음 가 본 게 66년에 시인 최병구 선생이랑 간 거였어. 그때는 전기가 없었어. 판잣집이었는데 가게 앞 신포시장에서는 아주머니가 조개 까고. 초라했지만 번화한 시장이었지.

백항아리는 카바이트 불을 켰어. 냉장고가 없으니 땅에 큰 항아리를 묻어 놓고 썼지. 들어가면 직사각형 구조에 방이 하나 있는데 2층 올라가는 곳이 있었어. 거기가 다 2층 구조였거든. 사다리 나무계단으로 올라가 서서 먹는 거야. 선반 있고. 병술이나 막소주 마시는데 안주는 새우젓이야. 양념도 하지 않은. 양재기에다가 ‘한 잔 주시오’하면 약주 하나 부어 줬어. 그거 마시면서 새우젓 먹는 거지.

안주도 있었는데 조기새끼 있잖아 황새기. 여러 명 가야 두어 마리 시켜. 감잣국도 있었는데 돼지뼈에 감자 몇 개 나와. 그러면 하나 있는 ‘뼈다귀’ 누가 빨아 먹나 눈치도 봤지.

신포주점이라는 곳도 있었어. 신포동 북청집 근처야. 보신탕 골목 안에 있어. 주인 남자가 한 씨인데, 경동에서 양복점 하다 망했어. 50년대 초·중반에 대포집 낸 거야. 이 집도 약주와 소주, 막걸리 팔았어.

이 집은 안주가 마른 북어야. 워낙 좁은 집인데, 안주 먹으려면 내가 북어를 두들겨야 해. 그래서 난로에 구우면 아줌마가 고추장 담은 접시를 줘. 자기가 구어서 먹는 거지. 백항아리에서 초벌한 예술인들이 돈 남으면 거기 가서 한 잔 더 하는 거야. 우리는 늘 가고.

80년대 초에는 미미집이 생겼어. 신포주점 맞은편에다 문 열었지. 주인이 남자인데 일하는 아줌마 하나하고 열었어. 참 사람이 인정 있었지. 당시 난 실직 상태였고.

   
 
저녁에 무작정 가면 사장이 술이랑 안주를 줘. 약주가 한 병에 500원, 북어 500원이었는데 1천 원은 거저 주는 거지. 소장파들이 모였어. 화가 허욱, 김영일 화백, 미협지부장 이정, 장주봉 선생 등 술을 마시거나 못 마시거나 저녁마다 분위기 좋아서 모여. 용해, 안 먹어도 모여 주는 게. 그렇게 모여서 미미집이 소장파 중심이 됐고, 백항아리는 연세 많은 어른들이 간 거야.

그때만 해도 문화예술인들은 수입이 없었어. 대한민국의 수많은 잡지 중 원고료 주는 데가 거의 없었지. 당시는 글 쓰는 것으로만 보람을 삼았어. 쓴 것을 서로 읽고, 얘기하고. 그게 자존심이자 자긍심이었지.
당시 큰 기업은 아니지만 향토기업들이 좀 있었어. 기업인들이 저녁에 대포집서 다 어울리고 술값 좀 줬지. 그렇지만 얻어먹었다고 문화예술인들이 구질구질하진 않았어. 자존심 있었지. 그때는 지금처럼 야박하지 않았어.

시장 상인들도 우리가 지나가면 “그 양반 예술하는 사람이야, 시 쓰는 사람이야”했어. 본인들은 시, 음악 모르면서도 예술하는 사람들은 인정해 준거야. 백항아리서 감잣국 살 돈 없을 때, 건어물상 가면 땅콩 까 놓은 거 있어. 그거 한 줌 집어오면 안주 되는 거야.

우리가 ‘특권층’이다, 문화예술인들은 ‘대단한 계층’이다 이렇게 한 건 아니야. 후원자가 많았던 거지. 막걸리 한 사발 후원자도 있고, 심정적으로 하는 이도 있고. 그러면 우리는 “열심히 쓰자”하는 거야. 술 먹고도 쓰고. 왕성하게 토론도 하고.

# 80~90년대, 중심지의 분산
80년대 들어 시청이 구월동으로 나가고 중심지가 분산됐어. 구월동, 남동구 이쪽으로 많이 나간거야. 그 전에는 거의 중구였는데. 남구 살아도 이쪽으로 왔지. 블랙홀처럼 모든 분야를 빨아들였는데 분산된 거야. 구심점이 없어졌지. 저녁에도 모이지 못하고.

광성고의 정순일 화백 등이 그때까지 출입했어. 누구였나, 신포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서성이는 나를 보고 ‘신포동 백작’이라고 별명도 지어 줬지. 연세가 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수일 선생만 근자까지 나와 일주일치라고 약주를 사곤 했어. 이후 신진 작가들이 합류했는데, 그 시절 같은 향수가 있을 수 없는 거야.

노을을 보면 “배 속에서 주충(酒蟲)이 꿈틀거린다”하고 당연히 신포동으로 모이는 거야.

90년대 들어서는 개인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어. 대중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고, 문화예술계도 그랬지. 행정에서도 지방자치하면서 제도적으로 지원하게 됐어. 문예진흥기금이 언젠지는 지원됐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시절부터 귀에 익었던 것 같아. 시가 됐던, 나라가 됐던 이런 방침 정한 건 고마운 거지. 효율성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힘이 됐던 건 맞아. 책 한 권 낼 수 있었고, 대포값도 됐으니까.

당시는 예총하고 민예총이 구심점이었어. 하지만 인간적으로 예술에 대해 집합 토론하는 그런 과거는 와해됐지. 사랑방 같은 게 없어졌으니까.

2000년대는 예전처럼 똥구멍 찢어지는 것은 없었어. 일부는 여전히 있긴 했지만, 생활은 나아졌지. 조금 움직이면 수입이 들어오잖아. 고료도 받으면 대포값이라도 하고. 인구가 팽창하면서 젊은 작가들도 이주해 왔어. 전에는 미협 회원 이름을 다 외웠는데 지금은 대단하지.

   
 

문화 목소리도 다양해졌어. 이제는 문화재단이 전문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서포트하는 것에서 나아가 정책을 개발하고 방향을 점검하는 역할도 해야 해. 시민들도 문화예술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성과물도 향유해야 하지.

# 순수예술에 경영 가미돼야
문화예술은 스스로 경제적 재화를 창출하지는 못 해. 미술작품은 재화지만, 시장에서 쉽게 유통되는 건 아니니까. 공장 재화와는 다르지. 100이라는 자본을 투자해 재화 100의 창출이 아닌 거야. 120이던 150이던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는 거지. 지나치게 경영논리로만 볼 순 없다는 거야.

하지만 격변하는 시대에 예전 논리만 갖고 있어서는 안 돼. 비율을 7대 3 정도 하는 등. 예전에는 문화가 100이었다면 지금은 20에서 30은 경영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 재단 구조 역시 경영 측면을 생각해야 해. 이익 창출의 기회를 가진 조직과 순수예술을 지원하고 발달시키기 위한 인력구조가 동시에 필요한 시점이야.

열정을 추구하되 조직이 현실적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주요 경력
▶시인
▶1987 ‘현대문학’ 추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전 한국문인협회 인천광역시지회장
▶전 인천아트플랫폼 운영위원장
▶전 인천문화재단 이사
▶현 인천광역시 도시계획위원
▶현 인천광역시 문화예술진흥위원
▶현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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