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가 없어 메달을 따기 힘들었던 시절에서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한국 근대스포츠 발상지인 인천체육 역시 급성장했다.”

인천체육은 세계 속에서도 뒤지지 않은 경기력과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했다.

고철호(77)인천시민원로회의 체육자문위원은 “스포츠 발전의 토대가 마련된 만큼 시민들과 체육인들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보 창사 40주년을 맞아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 ‘인천직할시’로 승격한 시기인 1981년 인천시체육회 첫 사무국장을 역임한 고철호 위원을 만났다. <편집자 주>

# 인천고 야구선수, 인천체육 큰 별 되다

   
 
인천고 야구선수 출신인 고철호 자문위원은 인천직할시 승격(1981년) 다음 해인 1982년부터 1993년까지 10여 년 동안 인천체육 살림을 맡았다.

1983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는 인천에서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제64회 전국체육대회’를 처음 단독으로 개최하면서 인천체육을 한 단계 올리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이후 인천도시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한 그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지난날 인천체육의 아련한 기억을 쏟아냈다.

고 자문위원은 지난 인천체육을 이야기하기 전에 인천시가 경기도에서 분리된 후 ‘인천직할시’로 승격하는 그날, 경기도체육회의 재산권 분할 문제를 먼저 말했다.

인천은 1981년 7월 1일 경기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체육회도 경기도체육회에서 ‘인천직할시체육회’로 독립했다.

“경기도는 그때 체육재산권 분할에서 인천체육 쪽으로 최대한 적게 예산을 배분하려고 했다”며 말문을 연 고 자문위원은 “경기도체육회는 당시 돈으로 3억4천여만 원의 예산이 있었는데, 인구수로 나누자고 했다. 근데 120만 명의 인구, 경기도내 인천이라면 필시 몇 푼 되지 않는 예산일 수밖에 없었다”며 “경기도체전 때 인천에서 대부분 경기를 했고, 앞으로 전국체전 때마다 인천은 경기도를, 경기도는 인천을 응원하자 등 회유와 압박을 적절히 섞어 50%에 가까운 1억4천만 원을 가져온 기억이 난다”며 온전한 인천체육 정립 시기인 그때를 기억하며 기뻐했다.

# 첫 단독 전국체전, 잊을 수 없는 일
고 자문위원은 인천직할시체육회 사무국장 재임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인천직할시 이후 치른 첫 전국체전이라고 했다.

인천은 직할시 승격 후 1983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제64회 전국체육대회’를 처음 단독으로 개최하게 된다.

그는 인천의 첫 단독 전국체전 때 가스 성화 점화, 개회식 카펫 사용, 경기기록 전산화 등을 인천전국체전 최초로 손꼽으며 자랑스러워했다.

“내 기억으로는 1982년 전국체전이 경남에 열렸던 것 같은데, 그때 대통령이 대회 개막을 알리려 직접 개회식장을 찾았고, 최종 성화 점화 후 성화에서 나오는 연기가 대통령에게 가면서 상당히 불쾌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억한 그는 “그때까지 성화는 휘발유를 사용해 점화했는데, 인천체전에서는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최초로 가스를 사용하기로 했다”며 “주안에 있는 가스회사 같은데, 직접 찾아가 가스분사 장치, 돌풍 및 폭우 등에 대비한 시험가동 등을 철저하게 준비해 성공적으로 성화대에 점화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또 그는 “개회식을 한 번 하면 잔디가 모두 파손돼 육상경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을 보완해 지금처럼 카펫을 처음 깔았고, 대회 경기기록을 수기로 했던 것을 모두 전산으로 처리한 첫 전국체전이 됐다”며 인천 단독 전국체전 당시의 업적을 세세히 설명했다.

이와 함께 고 자문위원은 당시 인천전국체전 때 나라에 변고가 생겨 대회가 중간에 중단될 뻔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마 10월 6일 인천전국체전이 개막하고 3일 지난 9일로 생각되는데, 갑자기 미얀마 아웅산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해 국가에 변고가 생겼다. 그때 국가적 차원의 비상사태가 발생했고, 모든 행사가 취소되기에 이르렀다”고 운을 띄운 그는 “대회를 접을까, 아님 어떻게든 계속 해야 하나 등을 놓고 인천에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인천이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치른 대회인 만큼 정부의 양해를 구해 끝까지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며 “그래서 인천은 정부에 제안했고, 그 제안은 바로 폐회식 때 북한을 규탄하면서 대회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대회를 종료한 기억이 난다”고 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말했다.

# 인천만의 체육예산, 가장 큰 성과
고 자문위원은 자신이 사무국장 시절 가장 보람 있었던 이야기도 꺼냈다.

“일단 경기도와 재산 분할 싸움에서 50%에 가까운 예산을 받은 것이 가장 잘한 것 같다”고 흐뭇해한 그는 “인천시의 체전 지원금 13억 원과 함께 체육진흥기금 30억 원을 마련한 것과 중구청 펜싱, 동구청 유도, 남구청 사격 등 여자 구청실업팀 창단에 이어 당시 8개 구청 직장경기부팀 창단이 내 생애 가장 큰 업적인 것 같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어 지난 인천체육에 대해 잠시 회상한 고 자문위원은 과거 인천체육의 발생과 정립에 대해 말한 후 현재 인천체육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2013년 인천전국체전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2013년 인천전국체전은 인천아시안게임의 리허설로 대구와 바꿔서 했다. 그런데 실패했다”고 지적한 그는 “관중 동원이 전혀 없었다. 옛날에는 비록 수업에 지장이 있었지만 수업보다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교육청과 합의해 학생 동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국체전에 시민들의 참여 유도를 했는데, 최근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이 인천아시안게임까지 이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인천전국체전을 보고 우려했던 바가 그대로 아시안게임에 나왔다”며 “영화감독이 인천아시안게임 개·폐회식을 진두지휘해 영상의 화려함은 있었지만 내용 면에서는 인천을 전혀 볼 수 없었고, 아시안게임에 대한 인천시민들의 반응은 전무했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평생 인천체육만 생각하면 살았고, 매일 인천체육만 걱정한다는 고 자문위원은 앞으로 인천체육과 한국 스포츠가 가야 할 방향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 인천은 물론 국내 스포츠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체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운동하는 학생선수들은 공부를 등한시하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은 벌써부터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학교체육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 자문위원은 “인천체육은 아시안게임 개최를 기점으로 세계 스포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며 “그런 인천체육을 모든 체육관계자들의 노력과 함께 시민들까지 합심해 이제 반석 위에 올려 놓아야 할 것”이라고 숙제를 제시하며 말을 맺었다.

고철호 인천시민원로회의 체육자문위원
▶인천 출생
▶인천고, 동국대 졸업
▶1982~1993년 인천직할시체육회 사무국장
 1974~1980년 인천시야구협회 전무이사
 1985~1987년 대한체육회 이사
 2013년~현재 인천시민원로회의 체육자문위원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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