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새해를 맞이해 갖는 소망은 누구에게나 간절하고 각별하다. 처음이라는 긴장과 시작이라는 각오와 함께 반드시 이뤄질 것 같은 확신이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희망에는 예기치 않은 함정이 배태돼 있기도 한다.

지나간 과거에 개입할 수도 없고 닥쳐올 미래를 통제할 수도 없기에 무한대로 흘러가는 시간은 인간에게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초래한다.

그래서 인간은 일별, 월별, 연별, 세기별 등의 단위로 나눠서 마치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것처럼 상황을 조작했다.

 이렇게 되면 작년의 과거는 올해의 현재가 돼 지난해와 새해는 동일한 1년이 된다. 이에 따라 또다시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고 믿고 이루지 못한 기존의 소망이나 새로운 소망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올 한 해도 작년과 똑같은 양상이 되풀이되면서 바람처럼 우리 자신을 스쳐갈지 모른다. 시간에 대한 체감속도는 나이에 비례해 그만큼 빨라진다. 이 사태는 누구에게나 해당된다는 점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을 일방적으로 수긍하기에는 어딘지 불편한 점이 있다.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다고 여기는 바탕에는 그 시간 동안 겪은 일 가운데 기억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자리한다.

재미있고 신 나는 일이 많을수록 기억은 풍부해지지만 삶이 단조롭고 유사한 날이 반복될수록 기억할 만한 경험은 적어지고 시간의 진행은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진다. 신기한 경험이 중심을 이루는 유년 시절이 더 길게 인식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삶을 진부하고 무료한 시간의 연속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새롭고 가슴 벅찬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나태하고 수동적인 삶에 편승해 기계적인 습관의 덫에 빠져 오늘을 어제인 양 살아간다.

그렇게 한 해를 무심결에 다 보내고 난 후에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에 당혹해 하며 또다시 희망을 앞세워 진지하게 삶의 태도를 추스른다.

희망은 결과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우리 자신을 부추기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삶에는 보람이 상실된다.

 재미와 보람이 없는 시간이 기억에 오래 남을 리 없고, 결국 과정이 사라진 시간은 부질없이 연말을 향해 과속으로 치닫는다.

재미와 보람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진통제가 질병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듯이 희망이라는 미래의 추상적인 가치는 당장의 고통과 두려움을 잊게 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효과는 극히 순간적이다.

몸의 건강이 항생제의 일시적인 약효로 유지되기 어렵듯이 역시 삶의 건강 또한 막연한 기대와 낙관으로 지키기에는 한계를 갖는다.

과정을 외면한 채 오로지 결과에만 집착해서는 한 해의 보람을 확보할 수 없고 의미를 담보하기 어렵다.

시간을 길이가 아니라 의미로 재면 하루가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고, 평생이 하루만도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과정이 의미가 없다면 빈 껍데기 인생에 불과하다.

반면에 단 하루를 살았어도 그 시간에 의미가 담기면 천금보다 귀한 삶이 된다. 보람을 추구하기에는 어떤 삶도 짧지 않고, 막연한 희망과 헛된 기대감에 의지해 살아가기에는 어떤 인생도 길지 않다.

의미와 보람 여부에 따라서 하루 24시간은 영원으로 통하기도 하고 허탈하고 허망한 한순간의 꿈에 불과할 수도 있다.

타성은 당장의 편안함과 익숙함을 제공하는 대신에 현재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을 박탈한다. 따라서 시간을 빼앗긴 것 같은 억울한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정지향적인 삶을 확보해야 한다.

목표는 결과만을 추종하는 희망이 아닌 과정을 통한 보람으로 달성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얻어진 성과여야 그 가치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서투르게 다뤄지는 시간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무심히 흘려보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날일 수도 있다.

하루를 일 년처럼 보람있게 살 것인가, 일 년을 막연한 희망에 의지한 채 빈 하루로 흘려보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채 새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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