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란 일반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규범’이라고 정의되는데, ‘질서유지기능’이 법의 중요한 기능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질서(秩序)’란 한자의 ‘차례 질(秩)’과 ‘차례 서(序)’의 조합어인데, 국어사전은 그 뜻을 ‘사물들의 규칙적인 배치나 배열 또는 그 원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어의 ‘order’라는 단어에도 ‘질서’라는 의미와 ‘차례(순서)’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돼 있다.

따라서 질서의 핵심은 ‘차례(순서) 매김’과 ‘차례(순서)의 준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모든 일은 첫 단추부터 잘 꿰어야 한다”라는 격언들도 바로 이러한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마땅한 순서에 따라 판단하는 일’이 재판관 직무의 핵심 내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최고 재판기관들이 연거푸 ‘순서를 그르친 일’이 발생해 많은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을 결정하자 많은 법리적 논란이 제기됐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심판 시기에 관한 것이었다.

당초 법조계의 일반적 관측은 헌법재판소가 (2015년 1월 중 나올 것으로 예측되는)대법원 판결 선고를 지켜본 후 (2~3월께)정당해산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석기 등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형사사건의 사실관계(‘실체적 진실’)가 먼저 가려진 다음에 헌법재판소가 정당해산 심판을 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즉,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온 다음에 그 내용을 충분히 참작한 후 ‘정당해산결정의 헌법적 요건 해당 여부’를 엄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한편, 17만 쪽이 넘는 방대한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고 법리적 쟁점을 충분히 정리하는 데 시간이 부족해 졸속 심판이 될 우려가 크다는 점도 지적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무모하리 만큼 용감하게’ 정당해산 결정을 내렸는데, 불과 34일 후인 올해 1월 22일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와 사뭇 다른 판단을 내놓아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대법원 판결에는 모순이 없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정당해산 결정의 주요 논거가 된 ‘지하혁명조직(RO)의 실체성’에 대한 판단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내란음모 무죄 판결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성급했다는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해산된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이 헌법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한다고 하고,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으로 적시된 인물 중 일부가 허위 사실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헌법재판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고 하며, 헌법재판관들의 전원 사퇴를 요구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러한 혼란과 비판을 헌법재판소 스스로 자초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편, 지난 1월 23일에는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에 ‘선수를 친’ 판결이 나와 또 논란이 되고 있다. 대법원은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보상을 받은 경우 국가에 별도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 법 제18조 제2항은 법원(서울중앙지법)의 위헌법률심판제청에 따라 현재 헌법재판소가 해당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는 조항이었기 때문에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이 많은 국민들에게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재판이란 ‘순서에 관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가치(이익)가 충돌될 때 어떤 가치(이익)를 우선시켜야 할지 순서를 가리는 판단이 그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재판은 ‘합당한 순서에 따라’ 이뤄져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순서조차 그르친 재판으로 “어떻게 국민을 납득시키겠다는 것인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재판기관들이 무질서의 단초를 제공하는 등 스스로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사례들을 지켜보면서 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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