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최대 명절, 설날이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 연휴도 길다. 내일 오후부터 또다시 민족의 대이동이 펼쳐진다. 일 년 중의 절기나 명절 등 그날에 행해지는 그때그때의 풍속 등을 월별이나 계절별로 차례차례 적어 풀이한 세시기(歲時記) 몇 권이 전해오고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정·순조(正·純祖) 때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 설날인 ‘원일(元日)’의 차례(茶禮)와 세배(歲拜) 등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들어있다.

“이날 사당에 제사 지내는 것을 ‘차례(茶禮)’라 한다. 남녀 어린이들이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歲粧)’이라 하고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을 ‘세배(歲拜)’라 한다. 시절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이라 하고 이때의 술을 ‘세주(歲酒)’라 한다.”

이 세시기에는 ‘떡국’에 대한 상세한 기술도 있다. “멥쌀가루를 쪄서 커다란 목판 위에 올려놓고 자루 달린 떡메로 무수히 내리쳐서 길게 만든 떡을 ‘흰떡(白餠)’이라 한다. 이것을 얄팍하게 돈 같이 썰어 장국에다 넣고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끓인 다음 고춧가루를 친 것을 ‘떡국(餠湯)’이라 한다.

이것은 제사에도 쓰고 손님 대접에도 사용하므로 세찬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다. 국에 넣어 끓였으므로 옛날에 ‘습면(濕麵)’이라고 부르던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시장에서는 시절음식으로 이것을 판다. 속담에 나이 먹는 것을 떡국을 몇 그릇째 먹었느냐고 한다”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떡국을 한 그릇 더 먹으면 나이가 한 살 더 먹는 것이라 했다. 세시기에 나오는 얘기처럼 해가 바뀌어 떡국 한 그릇 더 먹으면 그만큼 더 성장한다는 의미다.

시민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친지들과 함께 평온 속에 설 명절을 보내고 싶어한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 김매순이 당시 한양(漢陽)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에 보면 “설날부터 3일까지는 승정원(承政院) 각방(各房)에서는 공사(公事)를 보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관청에서도 출근을 하지 않는다. 또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고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집에서는 명함만 받아들이고 면회는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이 풍속지에는 사람들이 잘 되기를 빌어주는 표현들도 들어있다. “설날부터 3일 동안은 시내의 모든 남녀들이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길거리에 빛나며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새해에 안녕하시지요!’하고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賀禮)한다.

예컨대 아들을 낳으시라든지, 승진하시라든지, 병환이 꼭 나으시라든지, 돈을 많이 벌라든지 하는 말을 한다. 이렇게 바라는 바를 말하는 것을 ‘덕담(德談)’이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세시풍속을 담은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는 우리 모두가 설 명절에 즐기는 윷놀이에 대한 상설(詳說)이 있다. 주지하는 이야기지만 한 번 인용해 본다. “붉은 싸리나무 두 토막을 쪼개어 네 쪽으로 만든다. 길이는 세 치가량, 혹 작게는 반쪽의 콩만큼 만들기도 한다.

이것을 던지는 것을 사희(柶戱:윷놀이)라 한다. 네 개가 모두 엎어진 것을 모, 네 개가 모두 잦혀진 것을 윷, 세 개가 엎어지고 하나가 잦혀진 것을 도, 두 개가 엎어지고 두 개가 잦혀진 것을 개, 하나가 엎어지고 세 개가 잦혀진 것을 걸이라 한다.

그리고 말판에 29개의 점을 찍고 두 사람이 상대하여 던지는데 각각 네 필의 말을 쓴다. 도는 한 점을 가고 개는 두 점을 가며 걸은 세 점을 가고 윷은 네 점을 가며 모는 다섯 점을 간다. 말판에는 도는 길과 지름길이 있고 말에는 느린 것과 바른 것이 있어 내기를 결정한다. 설날에 이 놀이가 가장 성하다”고 했다.

필자에게 있어서도 모처럼 맞는 설 명절 연휴다. 온갖 시름 다 잊고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오랜만에 고향 찾아 귀성한 옛 친구들과 윷놀이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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