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들고 고향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하는 풍경은 옛말이 됐다.

‘新 설 풍속도’는 인천공항과 대형 외식업체와 더욱 친근하다.

극심한 취업난에 도서관과 학원은 설 연휴에도 북적인다. 차례상에 올릴 음식은 배달 주문하고, 온 가족이 모여 즐기던 윷놀이는 스크린골프장이 대신하고 있다.

명절보다는 겨울 휴가에 가까운 새로운 개념의 설 풍속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 설 맞아 해외로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올해 설 연휴기간(17~22일) 인천공항을 이용해 38만여 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40만여 명이 입국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총 78만6천 명으로 이는 역대 설 연휴 가운데 가장 많은 해외여행객 수치다. 지난해보다 13% 정도 늘어났다.

공사는 하루 평균 13만1천여 명이 공항을 이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처럼 긴 연휴를 시골보다는 해외나 국내 여행지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 설 연휴를 앞둔 15일 인천시 중구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이 연휴를 맞아 해외로 여행을 떠나려는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실제 포털사이트와 여행사 홈페이지에는 지난해 연말부터 해외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문의와 패키지 여행상품을 알아보는 네티즌들로 가득했다.

여행사들도 중국·타이완·홍콩·일본·싱가포르 등 비교적 가까운 나라들을 3박 5일~4박 6일 코스로 둘러볼 수 있는 ‘설 특선 상품’을 내놓았다.

박모(30)씨도 이번 설에는 고향보다는 2박 3일 중국 칭다오(靑島) 여행을 선택했다. 대신 설 연휴 첫날인 18일 가족들과 함께 성묘로 차례를 대신할 계획이다.

박 씨는 “매번 설 연휴 동안 가족들과 모여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즐거운 놀이를 하면서 집에서만 지냈는데, 이번엔 편안하게 구경하면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며 “사실 집에서 설을 지내는 비용이나 여행 가는 것이나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누구보다 아내와 딸들이 좋아한다”며 “설 연휴 내내 상 차리고 치우고 반복하는 일에 지쳐 피로에 시달리는데 여행을 간다고 하니 엔돌핀이 솟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가까운 도심 속에서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호텔에서도 설 특선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인천·서울 등 특급 호텔들은 설 여행객들을 붙잡기 위해 최대 20%까지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인천 S호텔을 선택한 김모(40)씨는 “설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온 뒤 가족들과 함께 특급 호텔에서 1박 묵기로 예약했다”며 “평소 비싼 가격 때문에 이용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기회에 부모님과 함께 스파도 받고 고급 레스토랑 음식도 저렴하게 먹을 수 있어 뜻깊은 명절이 될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 차례상은 배달 음식
차례 음식도 다양화되고 있다. 떡국을 포함한 차례 음식 전부를 주문·배달시키는 것은 이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이색 차례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치킨·피자다. 생전 조부모나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위주로 상을 차리다 보니 전통음식이 아니라 패스트푸드도 차례상을 장식하고 있다.

차례상 전통음식 중 10~20대 젊은 세대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 낭비하는 것보다 ‘조상님도 좋아하고 인기도 많은’ 음식을 준비하자는 발상에서 나온 재밌는 현상이다.

이모(34·인천시 연수구)씨는 “사실 조부모께서 중식을 좋아하셔서 짜장면이랑 탕수육을 준비한 적이 있다”며 “결국 차례상에 올리진 못했지만 차례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아이들도 우리 또래 사촌들에게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웃음을 지었다.

# 바뀌는 놀이문화
놀이문화는 전통놀이에서 사이버공간으로 이동했다. 예전 같으면 마당에서 아이들은 제기를 차고 어른들은 마루에 모여 윷놀이나 꽃놀이패(고스톱)를 붙잡고 있었겠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10~20대 가족들은 PC방으로 달려가 LOL(리그 오브 레전드)이나 피파온라인에 접속해 대결을 펼친다. 30대가 넘는 가족들은 당구장이나 스크린골프장에서 승부를 겨룬다. 당구장은 스포츠로 자리잡은 지 오래돼 그리 생소한 풍경은 아니지만 스크린골프는 최근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나타나 이용가격이 내려가고 주택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어 사이버골프장 속에서 ‘설맞이 컵대회’가 펼쳐진다.

최모(33·인천시 남동구)씨는 “지난 추석 때 당구장을 가려다가 사촌형 추천으로 스크린골프장을 찾았는데 가격도 크게 부담되지 않고 운동 효과도 탁월했다”며 “올 설에도 가족들이 모이면 스크린골프장에서 한판 겨뤄 보려고 한다”고 했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 취업과 바꾼 설

   
 

취업을 위해 명절 연휴를 포기하는 취업준비생들이 늘고 있다. 가족들과의 단란한 시간을 뒤로하고 올해 취직에 성공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것이다.

인천시 남구에서 자취 중인 신보영(26·여)씨는 이번 연휴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명절 연휴나 방학이면 항상 고향에 내려가 시간을 보내던 신 씨지만 지난해 8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 면접 스터디나 취업 강의 등의 일정에 참석하기 위해 당분간은 자취방에서 더 지내기로 결정했다.

신 씨는 “지금도 크고 작은 기업들이 공채를 진행하고 있어 매일 확인해 이력서를 내야 한다”며 “학교 근처에 있어야 설명회나 그룹스터디에 참여하기 편하고, 취업 관련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가족들을 만나는 것보다 취업 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털어놓은 신 씨는 “물론 가족들과 오랜만에 만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부모님도 내 마음을 이해하고 격려해 주셨다”고 말했다.

곧 졸업을 앞둔 김성환(27)씨 또한 가족들과 명절을 즐기는 것을 포기했다.

다른 때에 비해 연휴가 긴 이번 명절, 가족들은 모두 큰집이 있는 대구에 가 있을 계획이지만 김 씨는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김 씨는 “토익 강의도 설날 당일을 제외하고는 계속 강의를 한다”며 “강의가 쉬는 날에는 모의고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풀거나 인터넷 강의로라도 복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미 지난 8일 토익시험에 응시했던 김 씨는 오는 28일 토익시험도 접수해 놨다.

게다가 한국어능력시험 자격증이 있으면 여러 기업에서 채용이나 승진 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는 5월에는 한국어능력시험도 치를 예정이다.

김 씨는 “취업도 못한 상태로 졸업하기가 불안해 지금까지 졸업을 미뤄 왔지만 이제는 마냥 미룰 수도 없게 됐다”며 “당장 이달 말이 졸업식이라 더 조급하다”고 토로했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 나 홀로 ‘설’

   
 

“꼭 시골에 가야 하나요? 설 연휴는 그저 긴 휴일에 불과해요.”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근무하는 박지영(26·여·인천시 가정동)씨는 설 연휴가 그리 반갑지 않다. 2009년부터 최근까지 그녀를 포함한 가족들 모두 귀향길에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에도 가족들은 시골에 내려가지 않을 계획”이라는 박 씨는 “우리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설날 당일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게 됐고, 이번 설 연휴에는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올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녀가 친척들과 왕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골집이 영종도에 위치해 있어 어렸을 때 친척 언니·오빠들과 해변에서 게도 잡고 소라도 잡으러 다녔다”는 그는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들과 친척 어른들 사이가 좋지 않아 만나지 못했고,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어색할 것 같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 명절 때마다 아빠와 큰아빠가 다투시는 걸 봤다. 아마 돈 문제로 갈등이 생겨 아직도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반면 그녀의 외갓집은 분위기가 다르다고 했다.

“외갓집은 옆 동인 석남동에 위치해 있어 가기도 편하고, 또 이모들이 세 분 계신데 만났다 하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 매우 재미있다”는 박 씨는 “외할아버지가 특히 저에게만 세뱃돈을 많이 주셔서 설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시절이 생각나는데, 사실 3년 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모이지 않게 됐다”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그는 “예전처럼 세배도 하고 친척들과 오순도순 지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지금은 너무 사이가 멀어져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기엔 늦은 것 같다”며 “이번 설 연휴에는 강원도에 소재한 스키장으로 스키를 타러 간다”고 말했다.

서인석 기자 sis119@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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