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진 명지전문대 행정과 교수

 최근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과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아파트 경비원들에 대한 모멸적 언행 등을 본다. 이른바 잘난 사람들의 못난 사람들에 대한 횡포, 즉 이른바 ‘갑질’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말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들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 앞 문장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헌법 제11조 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소유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강조한 것이고, 국가뿐 아니라 개인도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에 있어서도 유대교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달리 말하자면 선민의식(elitism)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민의식도 그 사용 방법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악용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사용의 결과가 책임지는 선민의식일 것이고, 악용되는 경우가 갑질이라고 여겨진다. 영어에 pride라는 단어가 있다. 여기에는 좋은 의미로 자존심이란 뜻도 있는가 하면, 나쁜 의미로 교만이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선민의식도 그 사용 방법에 따라 극단의 뜻을 가리키는 이중적 말이 되는 것이다.

최근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대통령의 시간, 2008-2013) 후반부에는 구미의 아사히글라스 한국지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곳에는 우리처럼 번듯한 사장실이 없고 손님이 앉을 공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러한 사장의 자세가 선민의식을 바로 사용하는 예가 아닐까 한다.

진부하지만 어릴 때 많이 읽었던 이솝우화에는 사자와 생쥐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이른바 갑(사자)이 을(생쥐)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 갑이 어려운 처지에 빠지면 을도 은혜를 갚으면서 갑을 곤경에서 헤쳐 나오게 한다는 내용이다.

積善之家(적선지가)에 必有餘慶(필유여경)이라는 말이 있다. 선을 오랫동안 행하다 보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재력이 있다거나 권력이 있다고 해서 자손만대로 이어지리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러저러한 환난과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곤경에 빠질 때 우리를 위해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평소에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된 사람, 난 사람, 든 사람 중에 된 사람이 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는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어려운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도록 해 보이지 않는 곳에 선행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건전한 선민의식이 아니라 이른바 ‘갑질’을 계속한다면 이 사회는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한 입장의 표출 위험성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잘못된 선민의식을 소유한 자들에게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무시되고, 그들의 끝없는 갑질에 의해 자존심이 무너지는 사회 속에서는 피해자들이 최후에 의존할 것은 극단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한 사회의 건전성 여부는 중산층이 굳건히 받쳐 줘야 하는데, 중산층이 몰락한다면 우리의 사회도 위험에 봉착하리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니라.’ 그렇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우리일진데, 우리 모두 선을 행하다가 가심이 어떠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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