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밤을 도둑맞았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어둠이 있어야 할 곳마저 불빛에게 그 자리를 내줬다.

 멀지 않은 과거의 ‘밤’은 어둠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해가 저문 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호롱불과 양초의 연약한 불씨는 책장 한 번, 작은 한숨에도 사그라질 듯 온몸을 흔들곤 했다.

그 미약한 불빛이나마 아끼기 위해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서둘러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골목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이 인류에 등장한 시기는 채 200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던 19세기 중엽,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윌리엄 머독에 의해 발명된 ‘가스등’은 ‘밤문화’의 혁명을 이뤄 냈다고 평가할 만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간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만 사용됐던 불빛은 중산층에게도 보급돼 보다 많은 이들의 저녁을 밝혔다. 오늘날의 LED조명처럼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어슴푸레하게나마 빛나는 가스등의 불빛은 깜깜한 어둠이 주는 미지의 공포를 걷어내 줬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영화 ‘가스등’의 불빛은 좀 더 밝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가스등’의 불꽃이 작아져 그 빛이 희미해질 때마다 마치 환상처럼 혹은 꿈에서처럼 기이한 일들을 겪고 있다는 가련한 한 여인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고아소녀 폴라는 자신의 이모이자 유명한 오페라 가수 앨리스 앨퀴스트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집 안 거실에서 이모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폴라는 정신적·육체적 안정을 위해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모와 꼭 닮은 폴라였지만, 그 끼와 재능까지는 물려받지 못해 성악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그러나 반주자였던 그레고리와 깊은 사랑에 빠진 폴라는 공부를 중단하고 그와 결혼한 뒤 런던으로 돌아온다.

비극적인 그날의 기억을 잊기 위해 집 안을 새롭게 단장해 신혼집을 꾸며 봤지만, 폴라는 순간순간 두려운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언제나 자신을 끔찍이 챙겨주는 남편의 태도는 언젠가부터 지나친 환자 취급으로 인해 불쾌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폴라의 건망증, 환청, 환상,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보호해 주는 남편의 행동은 오히려 아내를 정신이상자로 낙인찍어 버린다.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채 남편의 통제 아래 생활하는 폴라는 급기야 스스로가 미친 사람이라 자인하며 환청과 건망증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내를 조종하는 남편의 검은 내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1944년에 발표된 작품 ‘가스등’은 간담이 서늘한 심리스릴러 작품으로 조지 큐커 감독이 발표한 할리우드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 속 배경은 어스름한 가스등 불빛이 더욱 미스터리하게 보이는 축축한 밤공기의 런던을 무대로 펼쳐진다.

영화 ‘가스등’에서 남편에게 조종당해 정신이상을 보이는 아내 역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 작품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비록 수상의 영광은 누리지 못했지만 작품을 함께한 모든 배우들은 뛰어난 역량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했는데, 특히 남편 역의 샤를르 보와이에의 숨통을 조여 오는 심리 연기가 일품이다.

피해망상과 강박적 편집증을 소재로 한 ‘가스등’은 1940~5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던 필름누아르와 함께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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