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

 요즈음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와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문제로 한국 외교가 시험대에 올라 있다. 두 문제 모두 미중 간의 패권 경쟁에 끼인 힘없는 우리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게 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사드’는 어쩌면 한미 동맹 차원에서 우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안보 이해 침해를 이유로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압력을 넣으면서 쟁점이 돼 버렸다.

‘AIIB’는 중국의 이다이이루(一帶一路: 신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양 실크로드 개발 전략) 즉 ‘신실크로드’ 전략을 추진하기 위한 핵심 국제기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준비되면서 우리에게도 참여를 요구해 왔으나 미국이 제동을 걸면서 쟁점이 돼 버렸다.

최근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이탈리아 등 미국의 전통 우방국들이 참여를 선언하면서 우리도 참여를 공식화하며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미중 간의 힘겨루기 와중에 우리가 선택을 강요당하는 사태는 미중 간의 패권 경쟁이 가열되면서 더욱 빈번히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사례, 즉 데자뷔(deja vu)가 적지 않았던 일이다. 조선 인조 때 새롭게 흥기하는 청과 쇠퇴하는 명 사이에서 임진왜란 때의 의리를 내세워 명을 지지하다가 청 태종 홍타이치의 기습공격으로 남한산성에서 치욕적 항복을 한 병자호란이 우선 생각난다.

요즈음 방송되는 대하사극 ‘징비록’에서 유성룡이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피로써 쓴 징비록의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외적에 힘없이 당하는 역사를 생각하면 자괴감이 든다. 이 모든 역사는 오늘날에도 모양만 바뀌었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는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언제든지 강대국에 침탈되거나 종속되는 숙명을 강요한다.

요즈음의 미중 간의 패권 경쟁에 끼인 우리의 모습은 이런 점에서 전혀 낯설지 않다. 문제는 이런 익숙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우리 정부의 장기적인 전략과 비전이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처럼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우리가 주변국보다 힘이 셌던 적은 별로 없다.

힘이 약하더라도 내부가 결속해 하나로 합치면 결코 우리를 약하게 보기 어렵다. 앞의 병자호란도 실용적인 노선을 견지하던 광해군이 반정에 의해 축출되면서 의리와 명분만을 앞세운 서인 세력이 아무런 대비책을 세워 놓지 않은 채 반청 정책을 노골화하면서 화를 자초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과거의 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동북아에 다자협력체를 만드는 데 우리가 나서야 한다.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을 일대일로 상대해선 우리의 협상력과 외교력에 한계가 있다.

어렵더라도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등 주변국을 함께 아우르는 다자적 지역협력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현재 고착 상태에 있는 6자회담 틀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북한 정권의 불가측성을 감안할 때 처음부터 새로운 틀을 짜는 것이 쉬울 수 있다.

둘째, 동북아 다자협력 추진 과정에 우리는 대의명분을 강조해야 한다. 이명박정부 때 실용외교를 천명한 적이 있다. 실용외교는 큰 나라가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는 처음부터 지역 평화와 공존공영 등 보편적인 대의명분을 강조해야 우리의 목소리를 국제사회에 관철시킬 수 있다.

유럽의 통합 과정에서 벨기에·네덜란드 등 베네룩스 삼국이 내세운 것도 모든 나라에 평등하게 적용되는 대의명분이었기 때문에 큰 나라들 사이에서 국가의 자존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셋째, 지역 협력에서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이 필요하다. 당장 AIIB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의 경제력에 비춰 볼 때 미국이 중국 주도의 새로운 경제질서를 일방적으로 견제하거나 막을 수 없다.

미국도 예를 들어 한·중·일 FTA를 비롯한 동북아의 경제통합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서는 안 된다. 미국 주도의 TPP(환태평양동반자협정)가 성공하더라도 어차피 동북아에서 중국을 빼고 경제통합을 이야기할 수 없다.

반면 정치·안보 면에서 동북아에서 미국의 기득권을 인정해 줘야 한다. ‘사드’ 문제만 해도 중국이 한미 동맹에 근거한 사드 배치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한국으로서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따른 자구적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다. 동북아 지역협력체 구축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하루도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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