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이 못난 사람이 난리가 나고 국정의 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국가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럼에도 아직 시골 구석에 살아남아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아아! 임진((壬辰)년 전쟁은 실로 참혹했다. 두 달이 채 못 되는 동안에 서울, 개성, 평양이 함락되고 팔도가 거의 모두 적에게 넘어갔으며 국왕이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고 나서도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나라를 보존하라는 하늘의 뜻이다.”

필자가 지난 2009년 봄, 각종 공직비리로 정부 고위층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는 것을 목도하고 탄세(歎世)의 글, ‘장대 끝에 굽은 낚시 어찌 모르는가’라는 제하에 인용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내용의 일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전란 동안 경험한 사실을 쓴 16권 7책으로 돼 있는 역사 기록물로 국보 제132호다. 환란에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당한 난이었기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우고자 피로 써 내려간 통사(痛史)의 기록이다.

작금에 우리를 허탈하게 하는 것은 우리 군(軍)의 방산비리((防産非理)다. 도저히 용납이 가지 않는 군의 부정이다. 아무리 썩어도 이 정도일까 하고 시민들은 할 말을 잊었다. 해군의 경우 함정에 탑재될 음파탐지기 등 장비 납품 과정에서 금품이 오가 군함의 성능을 약화시키는 비리를 저질렀다. 공군의 경우 전투기 정비대금을 부풀려 국고를 가로챈 것으로 드러났다. 육군의 경우도 특전사에 납품되는 방탄복의 시험 결과를 위조하는 등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비리를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은 군 장성들의 품위 손상 행위다. 해군은 방산비리에 이어 최근 골프장에서 캐디를 희롱한 장성들의 부적절한 행위가 사회적 물의를 빚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중장 2명을 면직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류성룡의 회한(悔恨)처럼 이러고도 나라가 보전됨이 희한할 뿐이다. 국군(國軍)은 누구인가. 나라의 간성(干城)이다. 첫째, 국군은 국민의 군대로서 국가를 방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함을 그 이념으로 삼고 있다. 둘째, 국군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제평화의 유지에 이바지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 셋째, 군인은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의 기상과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굳게 지녀야 한다. 국군의 복무규율상 강령을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군인으로서의 사명과 정신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돼 있다. 당연히 영해와 영공도 포함된다. 국토를 방위해야 할 탱크와 군함, 전투기가 부실한 부품으로 제작되거나 녹슬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나라가 지켜지겠는가. 군 지휘관이 정 위치해야 할 곳을 떠나 골프나 치고 부정 축재에 눈이 먼 군대라면 또다시 우리는 나라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당면하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하겠다.

온 나라가 서구 열강에 침탈당했던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가 불과 한 세기 전이다. 그러잖아도 지금 한·중·일 간 ‘과거사’를 놓고 공방전이 치열하다. 전에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우리 사회다. 필경 역사의 과오를 잊고 있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온통 지도층 인사들이 비리를 저질러 영어(囹圄)의 몸이 되곤 하는 소식들뿐이다.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힘없고 준비가 없어 당해야 했던 치욕의 과거 통사(痛史)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조정이다. 양신(良臣)은 보이질 않고 황충(蝗蟲)의 무리들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날의 과오를 징계해 후에 다시는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는 시경(詩經)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징비(懲毖)’정신을 결코 잊어선 안 되겠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