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희선 플레이플러스 고문

 나는 최근에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에게서 받은 저서에서 2007년 4월 8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기사를 인용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글을 접하게 됐다.

미국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2007년 1월 12일 워싱턴의 랑팡플라자 지하철역에서 거리의 악사로 변장해 출근길 시민 앞에서 연주를 했다는 내용이다.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벨은 악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낸 대신 그 자리에 종잣돈으로 1달러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던져 놓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오전 7시 51분부터 출근시민 앞에서 바흐의 ‘샤콘느’와 마누엘 폰체의 ‘에스트레리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등 여섯 곡을 45분 동안 쉬지 않고 연주했지만 행인에게서 벌어들인 수입은 총 32달러였다고 한다.

1분에 1천 달러 이상 버는 유명한 연주자가 무려 30억 원짜리 171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45분이나 연주한 수입이 고작 32달러라는 사실이 한동안 널리 화제가 됐다. 더구나 그 연주시간에 지나친 1천97명의 행인 중 멈춰 서서 1분 이상 음악을 들은 사람은 단 7명뿐이라고 한다.

‘워싱턴포스트’의 이러한 깜짝 이벤트는 이 유명한 연주자의 멋진 연주를 듣고 과연 일반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보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날 그 자리를 지났던 사람들은 그가 바로 그 조슈아 벨인 줄, 그의 손에 들린 악기가 그렇게 귀한 것인 줄 몰랐으며 벨 자신은 그처럼 철저히 외면당하리란 것을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럽에서는 미국과 다를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영국의 런던 워털루역에서 미국의 실험보다 3개월 뒤인 4월 17일 오후 6시 퇴근시간대를 택해 미모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타스민 리틀을 내세워 미국과 같은 이벤트의 실험을 했다.

그 결과 1천여 명의 행인 중 8명이 발길을 멈추고 음악을 들었으며, 연주의 총수입은 한국 돈으로 2만5천 원이었으니 크게 다른 결과를 얻지 못한 셈이다.

한국에서도 이 실험을 듣고 음악인들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보름 후인 2007년 5월 2일 오전 8시 45분 성신여대 피호영 교수가 한국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강남역 6번출구에서 어느 악기사에서 협찬한 70억 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와 1억 원짜리 활로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소나타 12번’을 시작으로 엘가의 ‘사랑의 인사’, 사리사테의 ‘로만사 안달루사’, ‘지고이네르바이젠’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6곡을 되풀이 연주했다. 연주 결과 2분 이상 머물러서 들은 사람은 5명, 수입은 불과 1만6천900원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초고가의 악기를 들고 훌륭한 실력을 보여 준 세 나라 음악실험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어떤 평론가는 사람들이 너무 바빠 삶의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즉, 앞만 보며 너무 열심히 사느라 정작 진정한 삶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분은 만약 음악가들이 ‘좋은 악기와 특별한 선곡으로 훌륭하게 연주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봐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즉, 좋은 연주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일 뿐이라고 한다. 거기에 아주 강력하고 특별한 ‘플러스알파’가 없다면 성공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을 보태야 놀라고 열광할 것인가? 애절한 사랑, 공감, 그리고 신나는 기쁨의 재료 등이 넘치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내는 힘이며, 다른 세계와 융합했을 때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음악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공감과 위안을 얻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표면적·잠재적 대화를 나누는 데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또한 앞의 세 나라 연주실험에서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이 상황에 따라 두 모습을 보여 준다는 사실의 사회적 시사점이다. 예컨대 사회지도층 인사가 그 지위와 명예에 걸맞지 않게 부정부패라는 이중적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심각한 사회적 지탄이 일고 심지어 김영란법까지 만들게 됐다.

자원외교를 구실로 그냥 갖다 버린 엄청난 낭비는 고사하고, 방위산업 부정은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망국적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의 안전과 장병들의 목숨과 직결돼 있는 방위산업의 부정은 목숨으로 변상한다 해도 성에 차지 않을 중범죄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할 망국의 범죄라는 사실을 부정할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정부는 철저하게 온갖 비리와 부정을 파헤쳐 국민 혈세를 착복한 사람들을 중벌로 다스려야 하고, 거기에는 예외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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