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해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가사노동이 여성만의 할 일로 규정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내와 함께 가사를 분담하는 것에 더 나아가 밥하는 남편 또한 늘어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집안일을 거들기는커녕 ‘밥 달라’며 큰소리치는 남성들은 소위 ‘간 큰’ 남자라 부르게 된 지도 벌써 20여 년이나 흘렀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아지며 가사를 분담하는 것이 요즘 세태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엄마’ 혹은 ‘아내’라는 이름으로 그녀들의 고단한 하루를 당연하게 덮어버리곤 한다.

오늘 소개하려는 작품은 집안일을 하는 아내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영화이다. 영화 ‘밥’은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아내 영화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후 나루세 감독이 여성과 아내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의 시작이 된 작품이다.

결혼생활 5년차에 접어든 부부가 있다. 도쿄에서 나고 자란 미키오는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오사카로 이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미키오는 친한 친구나 일가친척도 없이 남편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남편은 마치 집에 들어오는 이유가 밥뿐인 사람처럼, 아내를 보면 ‘밥 달라’는 이야기가 전부인 남자다. 이런 생활에 미카오는 지쳐가고 권태를 느낀다. 게다가 남편은 금전에도 무신경했다. 살림살이와 상관없이 좋은 구두를 사서 신는 남편을 보면서 그녀는 더욱 알뜰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매일이 다르지 않던 어느 날, 남편의 조카가 이들을 방문한다. 어여쁘게 자란 사도코는 밝고 꾸밈없는 성격이지만, 다르게 보자면 눈치도 없고 제멋대로인 말괄량이 아가씨다.

가뜩이나 팍팍한 살림을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가불까지 해가며 조카에게 용돈을 주고 오사카 관광도 시켜 준다. 어찌 보면 삼촌을 보러 온 조카에게 잘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사도코가 찾아온 후 생긴 일상의 작은 균열은 덮어 두려 했던 부부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부부의 갈등은 급기야 아내의 소심한 가출(친정집 방문을 빙자한 가출)로 정점에 오르지만, 아내의 방황은 며칠 뒤 도쿄로 출장 온 남편과 함께 오사카로 내려가면서 막을 내린다.

아내가 집을 비운 동안 남편은 아내의 빈자리를 느끼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내를 만난 뒤 멋쩍은 듯 ‘배고프다’는 말을 전하는 남편의 모습과 집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마음 편히 잠만 자는 행동으로 미뤄 볼 때 이 부부의 갈등은 해결되고 치유된 것이 아닌, 눈 질끈 감고 억지로 봉합해 버리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결국 이들은 다시 한솥밥을 먹으며 얼마간은 잠잠히 살아가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말괄량이 사도코 혹은 그 누구라도 이들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또 가져올지 말이다.

일본의 전후 1세대 감독으로 손꼽히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여성영화’ 감독으로 불리지만, 이 작품 ‘밥’의 서사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사유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평온한 가운데 조금씩 자라나는 갈등의 분위기나 여성 주인공이 자신의 심경을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방식은 나루세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차분한 연출력으로 인해 관객들의 귀와 가슴을 더 큰 울림으로 두드린다.

비록 미키오의 남편에게 아내의 가출은 작은 해프닝 정도의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해도, 관객에게 미키오는 우리의 엄마이자 아내와 다름없다.

 쓴웃음과 함께 돌아온 미키오가 또다시 황망히 떠나지 않도록, 오늘도 가정의 안녕과 건강을 위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준비해 주신 세상의 모든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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