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눈꽃이 흩날리던 봄의 아름다움도 5월의 햇살 속에 초록빛으로 물들어 간다. 계절은 인간관계와 닮아 있다. 푸릇푸릇한 봄날은 기분 좋은 첫인상으로 시작하는 관계처럼 설렘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처럼 진전된 관계는 가을의 곡식처럼 무르익어 가지만, 삐걱삐걱 어긋남 끝에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찬 냉랭한 관계는 겨울 한파보다 더 매섭게 코끝을 시리게 한다.

그러나 계절의 순환이 계속되듯 인간관계도 순환곡선을 그리며 지속된다. 하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과 달리, 인간관계의 순환주기는 일정하지 않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친밀감과 유대감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적정선을 유지해 줘야 봄과 같이 따뜻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은 영국 출신의 노장 감독 마이크 리가 바라본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을 사계절의 변화 속에 담아낸 작품으로, 세밀한 감독의 연출력은 관계 맺기의 변방 그 가장자리까지 촘촘하게 담아내고 있다.

런던에 사는 노부부 톰과 제리는 서로를 천생연분이라 믿으며 정 좋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질학자인 남편 톰과 심리상담사인 아내 제리는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언제나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다. 특별하지 않은 소박하고 평범한 이들 부부의 일상은 때로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데, 특히 아내의 직장 동료 메리는 이 가족의 삶을 동경한다.

 메리는 마치 복 없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그 일생은 불행의 연속이다. 젊은 시절 성급했던 결혼과 이혼, 또 다른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 메리는 버석하게 늙어 버렸다.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줄 고마운 안식처는 톰과 제리 부부뿐이다.

서글픈 메리의 슬픈 영혼마저 치유해 줄 것처럼 언제나 따뜻한 품을 내어 주는 부부의 관대함으로 이들의 우정은 영원히 지속될 듯 보였다.

그러나 행복한 이들 가족 속에 편승하고 싶은 욕심과 부부의 아들인 켄에 대한 메리의 비밀스러운 감정은 이들의 우정을 위태롭게 한다.

톰과 제리 부부 그리고 메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소원하게 살아가는 친척보다 동료 메리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엄연히 남으로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길 잃은 어린 새처럼 애처로운 메리의 모습은 타인이었기에 측은한 마음으로 보듬어 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우리 가족이 아닌 ‘남’이었기 때문에 톰과 제리 부부는 동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온하고 완전한 부부의 삶에 메리라는 불쌍하고 가여운 여성이 가족의 일원이 되고자 했을 때, 이들의 측은지심과 동정심은 사라져 버렸다. 누구보다 메리에게 관대했던 제리마저 메리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하며, 급기야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비정상인’으로 낙인 찍어 버린다.

다소 지루하고 밋밋하게 흘러가지만, 마치 내 이야기가 적혀 있는 친구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뜨끔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는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우정, 비밀과 거짓말, 오해와 갈등 등을 다채로운 감정과 관계 속에서 빼곡히 풀어내고 있다.

어느 한쪽 편에 서서 전적으로 동조할 수도 또는 비판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 속으로 관객을 이끄는 이 작품은, 추운 겨울이 가면 언젠가는 따뜻한 봄날이 찾아온다는 식의 고답적인 결말로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매서운 상황 속으로 관객을 몰아붙이며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인간관계의 이면과 그 모서리마저 직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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