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휴 뒤 잠적한 무기수 홍승만(47)씨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남지방경찰청은 29일 오후 4시 20분께 창녕군 장마면에 있는 한 사찰 뒤편 야산에서 홍 씨가 목을 맨 채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살인을 저질렀던 무기수의 도피 행각에 불안감을 느꼈던 국민들은 이제야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게 됐다며 안심하는 분위기인 한편, 법무부와 교정당국은 귀휴제도 자체의 존폐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난 귀휴제도의 폐지에 반대한다.

귀휴를 간 재소자들의 복귀율은 홍승만의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100%에 이르는 걸로 안다. 왜냐하면 복역 중 교정성적이 우수한 수형자에 한해 귀휴를 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 깊이의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면서도 겉으로는 착실한 모범수인 척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기수들은 15년 이상의 수형생활을 해야 귀휴를 가는데, 장기간 교도관이나 주변 동료들의 눈을 속이기란 힘들다. 또 장기수들은 기독교·불교·천주교의 종교활동 등 다양한 교정 프로그램을 통해 장기간 마음을 수양해 안정돼 있는 편이다. 어차피 몇 년 뒤에는 출소하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귀휴제도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과거 정치범으로 수형생활을 하면서 귀휴와 비슷한 단 하루 동안의 ‘집단 사회시찰’을 몇 번 나간 적이 있다. 한 번은 같은 정치범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전주 모악산 자락의 용화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재소자는 가족이 면회 와서 통용문을 지나 제법 거리가 있는 접견실까지 걸어나가는 것만 해도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큰 해방감을 느낀다.

 그런데 하루 동안 바깥에 나가 세상 구경을 한다는 생각에 일주일 전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내 나이 스물다섯, 무얼 꿈꿔도 무죄인 나이에 난 하루 외출을 앞두고 영화 ‘만추’와 같이 짧은 시간에 일어난 기적적인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푸른 수의 대신 교도소에서 특별 제작한 회색 점퍼를 입었고, 검정고무신 대신 운동화 차림으로 교도소 철문을 나섰다. 내 몸에서 광이 나는 듯했고 바깥 땅을 밟는 것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몽환적이었다.

봉고를 타고 용화사까지 가는 데 스치고 지나가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냥 건물과 사회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용화사를 찾아오는 아가씨들과 아주머니들은 우리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쑥덕거렸지만 우리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도 용화사 대웅전 아래 무쇠 가마솥을 만지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마솥을 만지면 아기를 낳는다고 해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만졌던지 솥귀가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나도 그것을 만졌는데 그 덕분인지 지금 1남 1녀를 두고 있다.

내 인생에 큰 기쁨과 추억으로 남아 있었던 감옥 밖의 하루 외출, 물론 도망가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 상상일 뿐, 즐거운 하루에 만족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편 무기수 홍승만은 어땠을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47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너무나 쓸쓸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그는 20대 초 강도살인미수로 약 7년간 복역했다. 그리고 출소한 지 4개월 만에 40대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한 뒤 무기형을 받았다. 다시 19년 동안 복역하던 중 모범수로 인정받아 4박 5일간 귀휴를 나왔다.

 그의 47년의 삶 중 절반 이상인 26년을 어두운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던 그의 귀휴는 얼마나 설렜을까. 첫날은 서울 송파구의 큰형 집, 다음 날에는 가족이 있는 가평에서 묵었다.

셋째 날엔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하남으로 왔고, 마지막 복귀 날에는 다시 교도소 근처에 있는 서울 큰형 집에 갔다. 이때만 해도 그는 복귀하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홍승만은 귀휴기간에 지인의 소개로 몇 년간 펜팔을 했던 장애인 여인을 만나 청혼을 했는데 거절된 것으로 밝혀졌다.

만약 이 청혼이 수락됐더라면 만추 속의 주인공처럼 홍승만은 극적인 사랑을 이루고 무사히 복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나마 무기수 홍승만의 창녕 사찰에서의 마지막 행적은 차분하고 담담했다고 전해져 지금도 감옥에서 귀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귀휴 대기자들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운영되는 지역민참여보도사업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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