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식 ㈔인천시서구발전협의회 회장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지금은 주거문화가 옛날보다 발달해 아파트나 단독주택이 대형화되고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집이 크고 번듯한 반면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요즘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많은 가정이 흔들리는 징후가 보이고 있다. 이것은 지난날 우리 가정에 부여했던 전통적인 의미나 가치가 전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같이 많은 사람들이 가치관의 혼미 상황을 경험하면서 심한 갈등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가정의 붕괴 내지 황폐화 현상은 일차적으로 부부관계 및 부모와 자녀 간 관계의 질(質)이 변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생계에 바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다. 학비 대주고 용돈 몇 푼 넣어주면 그만이다. 자녀들은 또 그들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부모를 외면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지금까지 가정윤리로는 부부간에 혹은 식구들 사이에 모두 우리 것이라는 공유 개념이 강했으나 지금은 몫을 분명하게 가르고,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는 물론 부부간에도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하다 보니 가족끼리 법정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지는 사회가 돼 가고 있다고 본다.

가정의 위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일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의 몫일 것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행여 부모의 일방적인 요구가 자식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부모 속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녀의 삐뚤어진 윤리의식 문제가 이런 비참한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고 교육시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곡식은 정성 들인 만큼 자라서 열매를 거두게 되지만 사람을 키우는 일은 뜻대로 되기 어렵다는 것을 자식 둔 부모라면 누구나 경험한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라도 자식에 대한 가정교육 문제를 한 번 살펴봐야 할 듯싶다. 가정은 잠자고 깨어나고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속삭임과 이해의 만남이 숨쉬는 곳이 돼야 하며, 서로 비난보다는 용서하고 자기주장보다는 상대를 이해하는 곳으로 자식들의 교육장소가 돼야 할 것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아버지의 자식사랑」 속의 글이 생각나서 옮겨 본다. 수석(壽石)에 취미가 있는 아버지를 따라 아들이 난생처음으로 돌밭에 가서 탐석을 하게 됐다. 아들은 모든 돌이 아까워서 이것저것 많이 주워 모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동안 하나도 줍지 못하고 돌밭을 돌고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왜 돌을 줍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아버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한나절을 보낸 후에야 겨우 수석 하나를 주웠다.

이제 각자 주운 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차를 타는 곳까지는 강가에서 8㎞ 이상 걸어야 했다. 10분쯤 걸었을 때 아들은 등에 짊어진 돌이 너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앞서 가는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는 어서 오라면서 그냥 앞서 걸어갔다. 아들은 짐을 내리고 몇 개의 돌을 버렸다가 다시 반시간쯤 걷고 등짐의 절반을 버렸으나 아버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계속 돌을 버리며 자동차 타는 곳까지 왔을 때는 두 개의 돌만 남았다고 한다.

아들은 천연덕스럽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무정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너는 돌밭에 와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고, 욕심껏 등짐을 채우면 결국 모두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대답했다는 내용이다. 말로 무엇을 가르치는 아버지보다 스스로 배우게 하는 아버지가 고맙다는 것을 그 아들은 돌밭에 다녀와서 깨우쳤을 것이다.

이제 자식들을 학교교육에만 의존할 것이 아닌, 이번 가정의 달에는 돌밭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가정교육의 교훈으로 삼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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