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실 대한결핵협회 인천지부장

 나에게 집안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의 유전자를 물려준 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 돌아가셨기에, 늘 살면서 만나는 어른들과 비교해 작고하신 아버지를 넘는 분이 안계시기를 바랐다.

그리고 항상 그 기준을 넘는 분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생전에 어머님이 어쩌다 아버님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건강치 못하였지만  당시로서는 일본까지 유학해 독학으로 공부를 할 정도로 자신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였으며, 또한 일본사람에 지지 않을 정도로 일본말을 잘하셨다고 했다.

더욱이 일본 오사까 부근에 살면서 전쟁 중에는 부근 시골에 식구를 이끌고 들어가 살면서 당시에 유행하였던 일본 군부나 정부에 일정거리를 두고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였다고 하셨다.

일본 패망 후 제일 먼저 인천에 도착해 많이 배웠지만 생활 근거지가 없어 막일 노동으로 생계를 이을 수밖에 없어 어린 형제를 셋집에 두고 어머니까지 장사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힘든 가정생활 속에서 당시로써 별안간 바뀐 환경과 문화차이로 이웃친구가 없다보니 늘 혼자여서 동생과 함께 지내다보니 자연 소심해지고 적극성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앞서기보다 뒤에서 처지지 않고 열심히 따라 다니기 바쁜 학교생활에서 그래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정찬숙 선생님을 만나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80명이 넘는 학생 중 학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동급생 친구를 방과 후 함께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셔서 친구도 사귀고, 친구집에 가서 당시 어렵게 볼 수 있는 책을 잠깐 잠깐 볼 수가 있었고, 더욱이 오가는 시간 속에 선생님이 등을 두드리며 “힘들지”하며, “몇 시에 학교에 오지?”하고 베푸시는 관심에 학교가 싫지 않았다.

또한 나에게 좀 더 큰 눈을 떠 진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일러준 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신 작고하신 정부영 선생님이셨다. 어린 나이에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중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긴 설명 없이 지금을 헤쳐나가야 하는 돌파구가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희망하는 학교에 입학해야 다음에 더 큰 난관을 넘을 수 있고, 그래야 홀로되신 엄마에 대한 아들로서의 도리라고 말씀하셨다.

인천중학교에 합격한 명단을 보고 웃음 지으시고 참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그 때의 마음은 마치 살아계신 아버지 같은 미더움이었다. 당시 등화관제가 있었던 어려운 시기에 힘들게 구한 몽당 양초를 밝히면서 커튼 내린 교실에서 어린 학생과 함께 공부하도록 지도해주신 그 열정이 당시로서는 힘들었지만 훗날 내 자신이 교직에 몸담을 수 있도록 해주신 계기가 된 것 같다.

당시 학교 현장에는 살기 힘든 사회상을 나타내듯이 극한 상황에 나타날 수 있는 욕설이나 교내폭력 그리고 궁핍한 생활에 죄의식 없이 옆 사람 물건을 가져가는 일이 교실에 만연했으나, 정 선생님이 담임으로 계셨던 우리 반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한분의 반듯한 선생님이 몸으로 보여준 가르침은 나 자신에게 교직생활을 하면서 늘 닮으려고 했으나, 격변하는 교직사회에서 노동 가치를 주장하는 일부 선생님과 함께 지내다보니 학생만 바라보면서 가르친다는 가치, 가치관이 정말 민망한 경우가 많았다.

다가오는 스승의날 즈음에 선생으로 살았던 삶이 그렇게 부끄럽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무리지어 주장을 펴는 낯설지 않은 모습을 보면 싫든 좋든 우리는 주변 사람을 닮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현역에서 떠나 있으나 자신을 추스르며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올바르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전직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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