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찬근 인천대학교 교수

 대학은 세상의 변화를 이끌고, 변화를 주도할 인재를 키우는 곳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대학은 변화를 가장 꺼려 하는 조직체로 지목되며, 그 이유로 대학의 집단 이기주의와 도덕적 해이가 거론된다.

그러나 일사분란하게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학을 비판하는 것은 대학을 규정하는 고유의 가치와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역사적으로 대학은 진리 탐구를 이유로 학문의 자유를 주창해 왔다. 그 결과 교수들은 각기 독립적인 학문의 주체로서 절대적 자율을 인정받았다. 온 세상이 ‘그렇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때, 누군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근대적 세계관이 대학에게 극적인 자율을 부여한 것이다.

 덕분에 대학은 역사상 그 어떤 조직체도 누리지 못한 자유를 구가해 왔으며, 자연과 기술, 인문과 사회, 예술과 체육에 이르기까지 전 학문 분야에서 기존의 통념을 깨는 새로운 원리의 탐구와 발견이 대학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이제 대학을 지배하는 환경이 달라졌다. 대학 수가 격증하고, 학령인구의 다수가 대학에 진학함에 따라 대학은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상아탑이 아니라 대중을 교육하는 3차 교육기관으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게다가 노동시장이 세계화됨에 따라 대체 가능한 노동력은 보수 하향 압박을 받고 있으며, 기술과 자동화의 급진전으로 노동수요가 하락함으로써 대졸자에게 마땅한 취업 기회가 현저히 축소됐다.

이러한 현실에서 대학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으며, 생각만 해도 낯설고 불편한 경영과의 접목을 시도해야 할 형편이다. 도대체 자율이라는 가치관을 계승하면서 환경과의 정합성을 꾀하는 대학 경영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대학은 효율만을 의식해 조직을 규율, 강제해서는 안 된다. 민간기업과 같이 이윤의 추구라는 단선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다양성의 추구가 훼손된다. 또한 공무원 조직처럼 투명성을 이유로 업무를 공식화·위계화·루틴화하면 창의성이 파괴된다.

대학은 독립적인 학문주체인 교수가 전문가적 양심에 입각해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곳이다. 따라서 교수 개개인은 희소한 지적 자본으로서 그 가치가 존중돼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노력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적 가치로 승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학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경영이 필요하다.

다만 톱다운(top-down)의 상명하달을 기대할 수 없으니 대학의 경영은 보텀업(bottom-up)이라는 자발성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의 경영자는 고단하게 발품을 팔아 내부의 자원을 섬세하게 챙겨야 한다. 교수들을 찾아 그들의 관심사를 살피고, 이를 어떻게 조직 전체의 발전과 현안과제의 해결-재정 확보, 학생 진로 확대 등-에 접목할 것인가를 토론해야 한다.

 또 어떤 학과가 어디에 역점을 두고 있는지, 연구와 교육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로운 시도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경청해야 한다. 이로써 재정의 확보는 보유한 내부의 지식, 경험, 노하우를 사회적 수요와 연계해 기획안을 타출하고 이의 가치를 인정받는 방식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흔히 대학에서 소통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한 절차적 요건으로 간주된다. 소통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이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접근해 진정한 민주성이 도외시되고 대학이 형식적 게임의 장으로 황폐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소통은 모름지기 자율적 지식주체들 간에 자발적 협업의 시너지를 유도해 사회적 공통 자본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학 경영의 요체는 혈맥과도 같이 소통의 망을 깔아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가치 창조를 유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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