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균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은 1915년생 예술가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유독 문인들은 한국 문단의 큰 별들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모국어 사용에 제약이 많던 때에 문학의 꿈을 키운 문학가들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위해 몸을 바친 그들은 서른 살에 해방을 맞은 후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했다는 공통점이 국권 상실, 해방, 한국전쟁, 남북 분단의 현대사회 격동기를 언어와 펜으로 살아내게 한 것 같다.

이 어려움이라는 것이 문학적 비중이 큰 작가들로 남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글은 시대상황을 표현하고 작가는 모름지기 그 시대를 쓰지 않고는 작가라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들을 기리는 문학제가 곳곳에서 열렸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인들 중 함세덕(咸世德, 1915~1950)의 문학이 어떻게 조명되고 치러졌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왜냐하면 인천과 끊을 수 없는 불세출의 극작가이기 때문이다.

35세의 일기로 요절한 그는 인천시 동구 화평동 455번지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부 함근욱과 모친 송근신 그리고 조부 함선지와 삼대를 살고 부친이 다녔던 인천일본어학교(인천상업학교 전신)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를 다닌 2대에 걸친 동문이기도 하다.

부친이 나주·목포에서 인천으로 귀향하며 문학과 연극에 몰두할 때까지 20여 년을 성장시킨 환경은 바다와 섬과 항구의 생활로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식민지적 삶을 승화 작품의 소재로 애호하게 됐던 것이다.

1936년 그의 나이 21세에 조선문학에 「산허구리」를 발표하며 극작가의 첫발을 내디디며 서해안의 한 포구인 산허구리를 극적인 공간으로 설정, 어부의 가족사를 그린 작품으로 다시 「무의도 기행」을 내놓으며 리얼리즘의 극치를 이루고 「해연」이라는 단막극을 발표,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인천적인 작품이라 지금까지도 칭송이 자자하다.

만석동 산 3번지 작약도와 영종도(옛 명칭 자연도)를 무대로 뭍을 오가는 뱃터 하인천을 지리적으로 집어대는 명칭이 지금도 불리는 것이다.

문학이란 지리(地理), 바로 자리를 얻어 자기의 세계를 해석하기에 지리는 작가가 삶을 영위하는 가장 현실적 공간이기 때문에 사실의 땅이며 사건의 현장일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연극에서는 유독 이러한 현장성이 요구되며 강한 것이다.

2002년 필자는 함세덕연구소의 일원으로 심포지엄에 참여하며 이야기를 풀었지만 이제 우리는 문학작품의 가치관을 찾아 정체성을 확립할 때가 아닌가 한다.

1950년 35세에 요절한 그는 14년의 생애 중 20여 편의 창작극과 4편의 각색글을 남겼지만, 공연이 안 된 작품이 없을 정도의 시(詩)적 리얼리즘의 성공을 가지고 온 작가는 아마도 그뿐, 누구도 없을 성싶다.

인천이 낳은 극작의 대가 함세덕의 대표작 「동승」에서 그가 한 말 ‘삶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이고 손을 내미는 일이다’처럼 이제 이 시대의 우리 시민이라면 손을 내밀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친일파와 월북 작가라는 사상의 널뛰기를 거듭했던 그는 1988년 해금과 동시에 재평가되는 만큼 인천의 연극계가 다시 한 번 함세덕의 연극 속에 깊이 들어가 볼 일이며, 인천에서 벌어지는 연극의 축제(예: 항구연극제, 소극장 페스티벌)도 함세덕 연극을 연구하며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5월 23일은 그가 태어난 날. 화평동 455번지를 휘돌아보며 망우동 묘지의 110-109511의 번호를 기억하며 내 땅의 극작가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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