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샌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힘겹게 삐걱대던 집에 비가 샌다. 거실 곳곳에는 이미 양동이가 즐비하다. 양동이뿐이랴, 오목한 그릇이며 냄비까지도 동원된다. 낡은 집에는 그 집만큼 오래되고 성하지 못한 노인 홀로 산다. 잡목과 수풀이 무성한 집 앞에는 희미한 오솔길만이 겨우 보인다.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부가 인적이 드문 그 길을 외로이 이용할 뿐이다. 딱딱하게 굳은 빵 위에 잼 한 스푼, 버터 약간만을 곁들일 뿐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했다. 수십 년을 매일 같이 입어 온 낡은 옷도 그는 소중히 여겼다. 어찌 보면 눈이 안 보이는 게 다행인지도 모를 만큼, 그는 허름하고 초라한 공간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적막한 숲 속, 곧 무너질 듯 삭아 버린 낡은 집 그리고 몸이 불편한 노인. 얼핏 외로워 보이는 삶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매일 같이 몰려드는 다양한 이야기가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미사를 집전할 수는 없었지만, 편지로 전해오는 수많은 이들의 아픔을 귀담아 들어주고, 그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며 야곱 신부는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사제의 눈이 돼 편지를 읽어 주던 자원봉사자마저 고령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야곱 신부는 새로운 사람을 찾게 됐다. 그렇게 레일라와 신부는 만나게 된다.

레일라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무기수로, 살인죄로 복역한 죄수였다. 그러던 중 사면을 받아 야곱 신부의 사제관에 오게 됐다. 신부가 레일라에게 요청한 것은 편지를 읽어 주고 답장을 써 주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오랜 수감생활로 피폐해진 이 여인에게 그 일은 성가시다 못해 한심한 일로 여겨졌다. 신부님의 기도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자신들의 아픔과 슬픔, 고민을 신부님에게 전한들 달라지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의미 없는 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제도 신자들도 레일라에겐 똑같이 어리석고 귀찮은 존재였다.

 그래서 편지의 반은 내다버리는 일도 그녀는 서슴지 않았다. 답장이 줄어들자 신부님을 찾는 편지도 멈춰 버렸다. 편지의 단절과 함께 야곱 신부는 나약해져 갔다. 절망에 빠진 모습을 보다 못한 레일라는 결국 신부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속내를 처음으로 털어놓게 된다.

존재가치를 부정 당하는 일만큼 절망스러운 순간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나약해지고 생의 희망마저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진정한 내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존재는 오직 나만의 의지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구할 수 있었다.

이는 야곱 신부가 얻은 깨달음과도 같다. 타인을 위해 온 마음을 다했던 그의 행동은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레일라가 편지를 쓰며 얻은 구원도 그 맥을 같이한다. 신부님을 위한 그녀의 행동은 결국 피폐하게 말라버린 그녀의 마음 또한 위로해 줬다. 결국 남에게 베푼 행동이 자신을 향한 구원으로 순환한 것이다.

영화 ‘야곱 신부의 편지’는 느린 호흡과 긴 여백으로 담담하지만 묵직한 감동을 이끌어 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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