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한국탁구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를 슬기롭게 보낼 수 있었던 스포츠 중의 하나였다.
특히 2001년 인천에서 시작된 코리아오픈탁구대회는 총상금이 미화 22만 달러(한화 2억4천여만 원)에 달하는 등 국내 최고 수준의 대회를 자랑한다. 숫자를 통해 한국 탁구의 역사 및 코리아오픈대회의 위상을 정리했다.

#6
15년째 이어져 오는 코리아오픈탁구대회의 또 다른 역사는 바로 인천이다. 코리아오픈은 그동안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열렸지만, 그리 큰 인기몰이를 하지 못하다가 2010년 인천에서 열리면서 다시 한국의 탁구 붐을 일으켰다.

올해 탁구대회는 인천에서의 6회째로 대회로 인천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코리아오픈탁구대회를 개최한 도시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22
코리아오픈탁구대회는 지난 2013년까지 챌린저대회로 치러지다 지난해부터 오픈대회 중 가장 높은 등급인 ‘슈퍼시리즈’로 승격되면서 상금 역시 훌쩍 뛰었다.

다음 달 1일부터 인천남동체육관에서 열리는 코리아오픈탁구대회 총상금만 최소 22만 달러(한화 2억4천여만 원)이다. 메이저대회는 11만 달러, 챌린저대회는 3만5천 달러로 상금 규모에서 대회 위상을 알 수 있다.

종목별로는 남녀 단식 우승 2만6천 달러·준우승 1만 달러·3위 6천 달러 등이며, 복식은 각각 6천 달러·3천 달러·1천500달러, 21세 이하는 2천 달러·1천 달러·500달러 등이다.

#1924
대한탁구협회에서는 지난 1924년 1월 ‘경성일일신문사’에서 주최했던 ‘핑퐁경기대회’를 한국탁구의 효시로 보고 있다. 이 시점을 계기로 탁구는 소수계층의 유희에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의 제2회 대회에는 300여 명의 남녀선수가 참가, 대성황을 이뤘다. 이후 일본식 연식공을 사용해 왔던 한국탁구는 1936년부터 구미에서 사용하던 경식볼로 전화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해 9월 조선탁구협회가 발족, 1947년에는 대한탁구협회로 개칭하고 첫 사업으로 제1회 전국종합탁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또 1950년에는 국제탁구연맹에 가입했고, 같은 해 현 아시아탁구연합(ATTU)의 전신인 아시아탁구연맹(ATTF)의 회원국으로 가맹했다.

이어 한국탁구가 국제대회에 처음 출전한 것은 1952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였고, 세계무대는 1956년 동경에서 열린 ‘제2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밟았다.

#2001
한국탁구에 화려한 개화의 시대를 열었던 이에리사·정현숙·박미라 트리오가 물러나고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동안 스타 부재의 공백기를 맞았던 한국탁구는 환상의 콤비 양영자·현정화의 등장과 유남규의 출현으로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에서 세계최강 중국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면서 그 인기가 상승했다.

그리고 1991년은 우리나라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탁구 종목이 남북 단일팀을 구성,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대회’ 여자단체에서 막강한 중국을 격파하고 우승하면서 한국탁구가 국위선양의 선두주자로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해였다.

이런 분위기를 이어 대한탁구협회는 2001년 세계 속의 한국탁구를 알리고자 첫 코리아오픈탁구대회를 유치·개최하게 된다.

서울에서 열린 첫 코리아오픈탁구대회에서는 남자 단식 김택수와 이철승이 각각 중국의 벽을 깨고 우승과 준우승을 일궈냈고, 여자단식에서는 유지혜가 준우승했다.

그리고 중국은 여자단식, 남녀 복식 등을 휩쓸며 탁구 최강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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