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문자는 인간의 말을 기록하기 위한 시각적인 기호 체계이다. 말은 일시적이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이것을 시각적인 기호로 바꾸어 기록해 놓는 문자는 인간의 생각을 정리하고 사유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매체이다.

세종대왕이 처음 우리 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는데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였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처럼 ‘인천 인물’ 박두성 선생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만든 한글점자가 바로 ‘훈맹정음(訓盲正音)’이다. 

송암 박두성(朴斗星, 1888~1963)은 강화도 교동면 출신으로 1895년부터 4년 동안 강화도의 보창학교에서 신교육을 받고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여 어의동보통학교(於義洞普通學校, 현 서울효제초등학교) 훈도로 취임, 교직자로서의 길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1911년 보창학교의 설립자 성제(誠齊) 이동휘(李東揮)로부터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의미의 ‘송암(松庵)’이라는 아호를 받게 된다. 후일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 불릴 수 있게 되는 것도 스승의 뜻을 받들어, 앞 못 보는 이들에게 빛을 주는 일에 평생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맹교육의 효시는 1898년 미국의 선교사 홀(R.S.Hall) 여사가 뉴욕 점자형 한글점자인 ‘조선훈맹점자’를 만들어 성경의 일부와 십계명을 점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제생원(濟生院) 관제를 공포하고 그 안에 맹아부(盲啞部)를 설치하는데, 1913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송암을 교사로 발령내면서 송암은 맹아교육의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시각장애인 교육은 사회복지사업의 하나였고 직업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며 그마저도 일본어로 되어있었기에 일본어를 모르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게 지면에 볼록 튀어나오게 점을 찍어 손가락 끝의 촉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든 특수한 부호글자이다.

송암은 프랑스인 루이 브라이유가 창안한 점자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시각 장애인이 한 번에 촉독(觸讀)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수가 6점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1920년부터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했다.

 나아가 1923년 1월 비밀리에 ‘조선어 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년간의 연구를 거쳐 1926년 11월 4일 이른바 훈맹정음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1443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1월 4일에 맞춰 반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한글 점자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을 점자 출판하였다. 맹인들에게도 민족의식이 더욱 고취되었음은 물론이었고, 1935년 5월에 개최된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한글점자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맹인들의 사회참여 통로가 확장되기도 했다.

훈맹정음은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1998년 문화관광부의 ‘한국 점자 규정집’으로 정리돼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점자는 우리 한글의 우수성처럼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약 20여종의 점자 보다 그 우수성이 탁월하고, 사용자의 편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하고 싶은 학업을 마음껏 할 수 있고, 사회에서 각기 자신이 맡은바 일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은 바로 이 점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훈맹정음은 세종대왕 이래 또 다른 문자 창제였고, 인천의 역사 문화적 저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중국 갑골문자 등 세계 주요 문자를 수집·전시할 수 있는 세계문자박물관을 건립한다고 한다.

인천은 금속활자로 찍은 최초의 상정고금예문과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팔만대장경을 조성시킨 도시이며, 한글 점자를 창제한 송암 박두성 선생을 배출한 지역이다. 세계문자박물관이 인천에 건립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우리의 역사적 가치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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