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문인 매월당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세상을 떠돌았다. 자연을 벗삼아 유람하던 매월당이 하루는 계유정난을 주도한 공로로 공신이 된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압구정에 이르렀다

. 정자 기둥을 바라보니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 ; 젊어서는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 쉬노라”라고 쓰여 있는 주련(柱聯)이 보였다.

 매월당은 이를 보고 앞 구절 중 도울 부(扶)자를 위태로울 위(危)자로, 뒤 구절 중 누울 와(臥)자를 더럽힐 오(汚)자로 바꾸어 “靑春危社稷(청춘위사직), 白首汚江湖 (백수오강호) ; 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 구나”라고 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배신(背信)의 정치를 하고 있다. 배신은 붕당(朋黨)을 지어 정쟁을 일삼는 정치세력간의 배반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배신이기에 하는 말이다.

요즘 보도되는 일련의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국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몇 가지만을 나열해보면 하나같이 기가 막히는 사건들이다. 계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새정치민주연합이 의원단 회합에서 보양식에 술판을 벌이고,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가 화해의 ‘러브샷’을 하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새누리당의 경우도 당정청 간 불통 속에 겪고 있는 내홍(內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막장 드라마’로 밖에 달리 표현이 안 된다. 심지어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제 정신들이 아니다. 중동호흡기 증후군(메르스)의 창궐로 나라가 어려운데도 이 틈 속에서조차 오로지 정치주도권만을 잡으려한다. 이러한 정당을 정당이라고 할 수 없다. 

여도 야도 결국에는 계파를 초월하지 못하고 싸우는 모양새가 점입가경이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모두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야 가릴 것 없이 주도권 장악하려고 패를 지어 벌이는 싸움 행태야말로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비길 만하다. 이것이 우리 정치의 한계라 생각하니 그저 허탈할 뿐이다.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정치뉴스를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한다. 필자의 한 친구는 TV를 시청하다가 정치 소식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끈다. 신문도 정치면은 읽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럴 때 필자는 정치인이 아님에도 괜스레 기자임이 부끄러워진다. 

정쟁의 종국적 피해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조항을 구태여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라의 주인이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이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병역기피, 탈세,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등 속칭 ‘정치인 4대 의무’만을 이행한 부류의 인사들이 지금 처한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정치권이야 늘 그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국방이 허술해지고 있다하니 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방산비리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거기에는 육해공군을 가리지 않는다. 드러나는 국방비리 소식을 보고 있노라면 멀쩡한 병장기(兵仗器) 하나 없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군대에 지급되는 방탄복은 소총에 뚫리고, 해군함정에 장착되는 적군 무기 탐지기가 물고기 떼를 추적하는 어군 탐지기로 대체되었다하니 이 어느 나라 군대인가.

 무기성능시험에서 불량 장비임에도 그대로 합격 처리돼 국방에 납품되고 있는 그런 나라다. 군사 기밀의 유출을 막아야 하는 기무사 소령이 중국 기관요원에게 오히려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됐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말 할 말을 잃게 한다.

하나같이 제 정신들이 아니다. 예전에는 군 장성 단 한 명의 사법처리 소식이라도 전해지면 가히 충격적인 뉴스였다. 이제는 3성, 4성 장군이 구속돼도 국민들은 놀라워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나라 걱정하는 낯빛이 아니다. ‘국가안위(國家安危) 노심초사(勞心焦思)’는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장인(掌印)이 찍힌 유묵(遺墨)에서나 보일 뿐이다. 지금도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국헌(國憲)을 문란하게 하는 난적(亂賊)들, 세상을 더럽히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